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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초심을 돌아보는 시간[동아광장/최인아]

입력 | 2021-08-07 03:00:00

창업 ‘죽음의 계곡’에 코로나까지 겹쳐
잇단 위기에 시작의 단심(丹心) 떠올려
현실의 벽 돌파하는 것은 마음속 불꽃
女배구가 그랬듯 출발의 마음 돌아보길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나는 자영업자다. 선릉역 부근에서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스타트업이 IT 기반의 창업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면 동네 책방도 스타트업이다. 스타트업 세계에서는 창업 후 3년에서 5년 사이를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라 한다. 우리 책방은 며칠 후면 오픈 5주년을 맞으니 이제 그 끄트머리에 와 있는 것 같다. 사실 창업은 처음 1, 2년을 버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그 시간을 넘긴다 해도 열 길, 백 길 크레바스와 낭떠러지가 사방에서 입을 벌린다. 더구나 코로나 같은 예상치 못한 재난도 겪는다. 이 재난은 유난히 힘이 세고 포악해서 많은 사람들이 애써 이룬 것들을 여기저기서 집어 삼키는 중이다.

5주년을 맞아 기념 잔치라도 할까 싶었으나 이런 판국에 잔치는 무슨, 접기로 했다. 그 대신 지난 5년을 돌아본다. 나는 왜 책방을 시작했을까? 30년 가까이 일한 회사에서 은퇴 같은 퇴직을 할 때 내겐 계획이 있었다. 일은 그만하고 공부를 하자고 정했다. 지적인 호기심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곤 내내 학생으로 살자고 정했더랬다. 오십 이후의 인생을 어떻게 살지 십 년 이상 고민하며 생각을 뒤집고 또 뒤집은 끝에 도달한 확신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위에서 보고 있다가 그렇게는 안 되지, 하며 내 계획을 비틀어 버린 것 같다. 퇴직 2년여 만에 노선을 변경해 다시 일터로 뛰어들었다.

늦은 깨달음이라 부끄럽지만 나도 사회적 동물이란 걸 퇴직하고서야 알아차렸다. 30년 사회생활을 그 흔한 모임 하나 없이 보냈다. 나의 친분 관계는 거의가 점 조직이었는데, 그래야 깊고 진지한 얘기를 할 수 있다고 믿은 거다. 친하지 않은 이들과의 네트워킹은 불편해 멀리했다. 그랬는데 퇴직 후 하루 스물네 시간을 어디에도 속한 곳 없이 자유를 누리자 슬그머니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그리워졌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회사에 다닐 땐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일에 쏟다 보니 틈만 나면 혼자를 찾았는데 다 늦게 ‘함께’가 그리워진 거다.

이런 마음이 조금씩 올라오던 중에 결정적 순간이 왔다. 드라마 ‘미생’을 보던 때였다. 장그래 사원의 팀은 사장님을 비롯한 임원들께 새해 사업 보고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 중이었다. 그들은 구성안을 몇 번이나 뜯어고치며 연일 밤샘 준비를 했다. 그 장면에서였다. 갑자기 맥박이 빨라지더니 내 안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프레젠테이션, 저거 내가 해야 되는데,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광고쟁이로 일할 때 우리 일은 프레젠테이션에서 결판이 나곤 했고 나는 오랫동안 우리 회사의 대표 프레젠터였다. 그 기억이 되살아나자 다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올라왔다. 그걸로 게임 끝. 나의 욕망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면 해야 했다. 나는 그렇게 일하고 살았다. 그날 이후 짧았던 대학원 생활을 접고 다시 일터로 나왔다. 그때 나는 열렬히 쓰이고 싶었다. 아직 할 줄 아는 게 좀 있는데 그걸 세상에 풀어놓고 싶었다. 그건 다시 일하는 거였고, 쓰일 수 있다면 보상과 상관없이 기쁠 것 같았다. 그렇게 ‘책방마님’으로 성실하게 일해 5주년을 맞았다.

그동안 책방에서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났고 저녁마다 훌륭한 저자와 선생님들을 모셔서 공부도 많이 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코로나가 자영업자에게 안긴 현실은 엄혹해서 과연 이 터널이 끝이 날지, 어떻게 버텨야 할지 걱정이 크다. 그래서 돌아보았다. 책방을 시작했던 때의 마음, 초심을. 꼭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든 수년간 해나가다 보면 어려운 시간을 맞는다. 그 구간을 무슨 힘으로 헤쳐 나갈까? 처음 그 길로 들어설 때의 단심(丹心)을 돌아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첫발을 내디디던 순간의 뜨거운 마음에서 다시금 에너지를 얻자는 뜻이다. 물론 아무리 강철 같은 의지로도 돌파하기 어려운 현실의 벽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벽이 완전히 앞을 가로막기 전까지는 내 마음속 불꽃을 다시 끄집어내 보자는 거다. 이번 올림픽의 여자 배구 팀처럼. 아, 말이 나온 김에 여야 대통령 후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의 단심은 무엇인가? 권력욕 외에 그 마음엔 무엇이 들었는가? 어렵게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을 위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거기 있는가? 나중에 변질된다 하더라도 출발하는 지금의 마음엔 있는가? 나의 단심, 초심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이다.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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