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의 콘크리트 룰을 해머로 깨고 역주행 중인 ‘보니와 클라이드’의 당참을 상상했었다. 다이도처럼 포근한 음색으로 휘트니 휴스턴의 절창을 뿜을 수 있는 특별한 여성의 어떤 전형을 미리 속단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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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들이 담긴 유리병, 아직은 꽁꽁 숨겨둔 2집의 14곡을 이날 백예린과 함께 들었다. 1980년대 시카고 하우스, 1990~2000년대의 UK 개러지 사운드, 2010년대 인디 팝과 드림 팝까지…. 다채로운 사운드 스펙트럼, 새로운 실험이 백예린의 세계를 또 한번 깨뜨리고 확장하고 있었다.
“전작이 동화 같고 아름다웠다면 신작은 저의 모 난 부분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좀 걱정도 돼요.”
타이틀곡 ‘Hate you’에는 ‘F워드’도 등장한다. 신작은 백예린의 한 해를 기록한 일종의 콘셉트 앨범이다.
“그날그날 쓴 곡을 날짜순으로, 캘린더처럼 앨범에 배치했어요. 수록곡의 가제는 모두 ‘0123’ ‘0216’ 같은 날짜였거든요. 일기장을 공개하는 느낌이어서 실은 좀 무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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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시작했어요. 신작에선 직접 사운드를 고르고 편곡에 참여하는 비중이 늘었죠.”
백예린은 올 2월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고 영예인 ‘올해의 음반’을 비롯해 세 개의 트로피를 쥐었다. 지난해엔 한국인이 부른 영어 노래(‘Square (2017)’)로 주요 차트 정상을 석권하는 가요 역사상 초유의 일을 해냈다.
“자신 안의 수많은 자아에게 ‘네 자신에 대해 말해줘’라 부탁하는 셈이에요. 좀 복잡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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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결 같은 색소폰 아웃트로가 인상적인 3번곡 ‘I am not your ocean anymore’는 “휘트니 휴스턴의 R&B와 ‘워시드 아웃’의 드림팝이 혼재된 느낌”(구름). 대담한 반전을 탑재한 5번 곡 ‘Ms. Delicate’에는 들릴 듯 말 듯한 라틴 퍼커션까지 촘촘하게 짜 넣었다. 4번 곡 ‘Hall&Oates’에는 몽롱한 일렉트릭 피아노 위로 1970, 80년대를 풍미한 미국 듀오 ‘홀 앤드 오츠’에 대한 헌정을 담았다.
신작의 변화엔 새로운 공동 편곡자 방민혁의 참여도 한몫했다. 백예린은 “과감한 브레이크나 악곡 전환 같은 선택을 더 용기 있게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앨범도 99%의 가사가 영어다. 발음이 부드러워 본인의 가창에 잘 맞기 때문이라고.
“영어 작사가로서는 블러섬 디어리(1924~2009)의 시적 은유, 에이미 와인하우스(1983~2011)의 직설적 디테일. 상반된 두 스타일에서 동시에 큰 영향을 받았어요.”
“성격이 이렇다(내성적이다) 보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늘 두려웠어요. 그래서 (JYP) 연습생 생활도 힘들었죠.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평가를 받는 게 너무너무 두려운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큰 회사를 나와 자립하는 일보다 더한 공포는 타인에 의해 자신의 세계가 깎여나가는 일이었다.
백예린은 신작 가사 중 ‘Hate you’에 담긴 것이 가장 맘에 든다고 했다.
‘널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해/왜냐면 나 같은 사람은 너 같은 사람들을 통해 더 나은 곡을 쓰거든.’
백예린의 현재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해보였다.
“제가 너무 좋은 음악을 들으며 여기까지 온 것처럼, 제 음악이 어린 세대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기를 바라요. 저를 기른 보아, 빛과 소금, 유재하의 음악처럼, 그렇게요.”
임희윤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