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농사 발달과정
농부가 갓 수확해온 벼를 말리는 모습. 동아일보DB
○벼농사와 농업기술의 발달
사람이 가장 많이 먹는 곡식은 쌀, 밀, 옥수수 등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재배하기 어려운 작물은 단연 쌀입니다. 재배 조건과 과정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밀과 옥수수는 경사진 곳에서도 키울 수 있습니다. 반면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평평한 곳에 논을 만들고,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리시설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해마다 논에 거름을 많이 주고 토지를 가꾸어야 합니다. 쌀의 재배 과정은 다른 농작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합니다. 벼의 싹 틔우기, 못자리에서 모 키우기, 모내기, 김매기, 벼 베고 타작하기, 도정(벼의 껍질을 벗겨 쌀로 만드는 것)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농지 증가와 농업 기술의 향상은 3000년에 걸쳐 아주 조금씩 변화했고, 그에 따라 생산량도 서서히 증가하였습니다. 모내기 방법이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데 약 500년이 걸렸습니다. 농업 기술은 부모에 의해 자식에게 전수되면서 천천히 발전했습니다. 그 결과 벼농사 과정이 안정적으로 관리되었지요.
농업은 기후의 영향, 특히 가뭄이 큰 변수였습니다. 가뭄으로 생산이 줄면 국가에, 그리고 개개인의 삶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과거에 쌀은 언제나 부족한 상태였고, 쌀의 증산은 정부와 모든 농민의 꿈이었습니다. 보통 평년작보다 생산량이 5∼10% 늘어나면 풍년, 그만큼 줄어들면 흉년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풍년이 들어도 식량이 남아도는 시대는 없었고, 우리 역사상 거의 3000년 동안 늘 쌀은 부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일벼 보급과 쌀의 자급자족 성공
쌀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지고 절량농가가 사라진 시기는 1970년대 중반입니다. 이 시기 쌀 생산이 급증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종자 개량, 다양한 농자재의 보급, 정부의 강력한 쌀 증산 정책이죠.
벼의 품종은 크게 동남아시아에서 많이 재배하는 인디카종과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재배하는 자포니카종으로 나뉩니다. 인디카종은 쌀에 찰기가 없는 품종이고, 자포니카종은 찰기가 많고 밥맛이 더 좋은 품종입니다. 1960년대 중반 필리핀에 있는 국제미작연구소는 인디카종을 개량하는 데 성공했고, 그 벼의 이름을 IR8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품종은 줄기가 강하고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며, 질소비료를 많이 주어도 웃자라지 않고, 벼 이삭이 무거워도 쓰러지지 않으며, 잎이 두꺼워 광합성에 유리한 특성이 있었습니다. 수확량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어 ‘기적의 볍씨’라고 불렸습니다.
○쌀 자급자족 달성의 한계
쌀의 자급자족은 우리나라 농업사에서 가장 커다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한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1977년 이후 통일벼 재배에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냉해 피해, 쌀 맛이 떨어지는 점, 재배에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쌀 가격이 낮다는 점 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정부는 통일벼 재배 면적을 유지하기 위해 통일벼를 시중 가격보다 비싸게 사들이는 수매제도를 운영하며 재배를 독려했습니다. 그러나 소비자의 외면, 수매제도 운영 과정에서 나타난 재정적자 문제, 쌀 소비의 감소 등으로 통일벼 재배를 포기합니다. 통일벼는 1980년대를 전후해 재배 면적이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 우리 들판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쌀은 자급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육류와 밀가루 등의 소비가 늘고 쌀의 소비가 줄었기 때문입니다. 자포니카 계열의 품종 개량도 꾸준히 이루어졌습니다.
둘째로 농약과 화학비료는 생태환경에 피해를 줬습니다. 농약을 뿌리다 병에 걸리는 농민도 증가했습니다. 셋째로는 쌀 이외의 작물들은 수입에 의존하면서 식량자급률이 점점 떨어졌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쌀을 제외하고 대부분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다른 식량자원과 농업 발전에 소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