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한화생명 라이프플러스랩
당시 미국에서 교환학생을 지내던 나는 ‘어차피 안 볼 사이’에도 이름을 주고받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이들의 문화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터였다. 때로는 가식일지언정 미소 띤 얼굴로 주고받는 안부가 좋았고, 생면부지 타인의 이름과 일상을 궁금해할 수 있는 여유는 더 좋았다. 같은 버스를 기다리며, 지하철 옆자리에 앉아서, 의도 없이 공유했던 찰나의 시간들은 지나와 큰 추억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서에는 오늘은커녕 지금 보고 말 사이에 이름을 묻는 것이 다소 공포스럽게 느껴졌으리라. 한국 사회에서 통성명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익명에서 기명이 된다는 것. 서로의 일생에 ‘행인1’ 아닌 ‘조연’이 된다는 것. 이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은 ‘어차피 안 볼 사이인데’라는 허무주의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연의 길이 내지는 필요로 통성명의 여부, 추억의 자격을 재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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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삶의 환유라면, 인생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인연은 헤어짐을 전제로 한다. 다만 그 길이와 밀도가 다를 뿐. 이 때문에 ‘어차피 헤어질 건데’라는 말은 사실 모든 인연에 해당되는 숙명과도 같다. 어차피 헤어질 인연이니 마음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것, 추억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은 삶 전반에 대한 태도와 다름없다. 생의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추억의 가치는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욤 뮈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아빠, 만약에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볼 수 없을 땐 어떡해야 돼?” “행복했던 때를 생각해. 그 사람하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 그 기억만으로도 살아져.”
어차피 헤어질 테지만 그래도 추억은 남는다. 때때로 다칠지언정 모든 찰나의 추억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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