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의 역사/미셸 파스투로 지음·고선일 옮김/368쪽·1만8000원·미술문화
이 책은 대담하며 권위적인 색, 빨강의 역사를 다룬다. 고대 로마부터 18세기까지 서유럽에서 빨강은 그 어느 색보다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었다. 중세 문장학의 권위자인 저자가 ‘파랑의 역사’(2000년)와 ‘검정의 역사’, ‘초록의 역사’를 내고서야 ‘빨강’을 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빨강은 인간이 처음으로 제어하고 만들었던 색이다. 제작 시기가 기원전 1만5000∼기원전 1만3500년경으로 추정되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의 들소도 붉은색으로 채색됐다. 고전 라틴어에서 ‘빨강’은 ‘채색된, 유색의’라는 의미로도 쓰이며, 어떤 언어에서는 색을 나타내는 용어로 하양, 검정, 빨강 세 가지만 존재할 정도다. 이렇게 고대와 중세 사회에서 가장 원초적이며 우월했던 빨강은 중세 말 그 위상이 급속도로 흔들렸다. 귀족적인 색으로 급부상한 파랑, 사치와 우아함을 표상한 검정의 공세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종교개혁 이후 비도덕적이고 퇴폐적인 색으로 낙인찍힌 빨강은 16세기 말부터 퇴조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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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색채의 개념 규정이나 상징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맥락에서 의미를 분석했다. 이 덕분에 색채를 렌즈로 사실상 역사를 돌아보는 기분이 든다. 다만 그 역사가 전 세계가 아닌 유럽에 한정된 것은 유념해야 한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