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이 초래한 남북관계 비극 모른 척 친구 흉내 내면 다인가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김정은이 집권 6년 만에 ‘대남사업’의 샅바를 잡은 데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2016년부터 2년 동안 최고로 끌어올린 핵능력을 대충 보유하면서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평화 코스프레가 필요했다. 출범 초기 정치도 경제도 되는 게 없었던 문재인 정부는 그런 북한을 다양한 방법으로 유인했을 것이다. 둘의 공생은 성공하는 듯했다. 2019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을 내치기 전까지는.
이런 불편한 진실을 상기한다면 ‘역사상 가장 좋았던’ 남북관계가 최근 갑자기 ‘대적관계’가 된 것이 아니다. 최고지도자들의 동상이몽 속에 겉으로만 좋아 보였을 뿐이다. 김여정과 탁현민의 현란한 이미지 정치 속에 실질적인 관계는 크게 진전된 것이 없었다.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은 김정은과 문 대통령 그리고 측근 일부만이 반복해 등장하는 연속극처럼 보였다. 이산가족 상봉은 한 차례에 그쳤고 민간 교류는 거의 진전되지 않았다.
김여정은 그러면서 남측을 향해 ‘적은 적이다’라고 했는데, 그걸 지금 알았나? 할아버지 김일성의 권력욕으로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을 치른 남과 북은 기본적으로 대적관계다. 하나가 죽어야 끝날 것 같은 체제 경쟁은 70년이 된 지금도 끝나지 않고 있다. 소련과 중공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고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김일성의 과오를 감추기 위해 전후 북한 지도자들은 미국을 제국주의로, 남한을 신식민지 파쇼 국가라 낙인찍은 뒤 주기적으로 대미, 대남 도발을 하며 체제의 정당성을 유지하려 했다.
이런 제도화된 적대관계에 기생하는 권력자들이 있었다. 정치군인으로 평생 남측을 골탕 먹이는 데 전문성을 쌓아온 김영철 당 부위원장이 대표적이다. 그런 자들의 권유와 설득 속에 김정은이 집권 10년 가까이 할아버지, 아버지 때와 같은 대형 대남 도발을 자제해온 것 자체가 오히려 비정상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에겐 남한을 잘못 건드리면 미국에 얻어맞는다는 지혜라도 있었다. 젊은 김정은과 김여정 남매에게 그럴 자제력이 있을까.
북은 적을 적이라 하며 속내를 드러내는데 문재인 정부는 여전히 친구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김여정의 한마디에 말도 안 되는 법 조항으로 대북전단을 불법화하며 국제적인 망신을 무릅쓰고 있다. 1980년대 군부 권위주의와 맞서는 과정에 대안체제로 잘못 받아들인 김일성 북한의 환상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김정은을 판문점과 싱가포르, 하노이로 끌어내는 과정에 말 못 할 약점이라도 잡혔기 때문일까?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