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백록담 북벽 정상에 제주4·3사건 당시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한 뒤 개방을 기념하는 ‘한라산개방평화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단이 허물어져 약간 기울어진 가운데 기념비 오른쪽 상단에는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임재영기자 jy788@donga.com
그동안 한라산의 가치를 논할 때 지형·지질, 동·식물, 오름(작은 화산체), 계곡 등 자연경관이 핵심이었다. 상대적으로 인문 분야에 대한 연구나 조사는 소홀했다. 한라산은 제주사람들에게 생명과 생활의 원천이다. 의식주 재료를 제공했으며 다치고 힘든 심신을 달래는 성소(聖所)이기도 했다. 한라산국립공원과 인접지역을 중심으로 현장 답사, 증언 채록, 자료조사 등을 통해 한라산에 담겨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싣는다.
17일 오전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인 한라산 백록담 북벽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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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한 것을 기념해 당시 제주도경찰국장이 이듬해 백록담 북벽 정상에 비석을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은 한라산국립공원지역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제주4·3사건(이하 4·3사건) 유물 유적 가운데 하나다.
● 4·3사건 유적 산재
비석 외에 ‘평정기념비’(平定紀念碑)라는 글자가 새겨진 또 다른 비석이 1949년 7월 23일 백록담 서벽 정상에 세워졌다. 이 비석은 현재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언제 사라졌는지 조차 알려지지 않았지만 평정기념비를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을 확인한 결과 1958년까지 서벽 정상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비석에 새겨진 평정기념비 위에 1952년에는 ‘승리’라는 글자를 쓴 흔적도 확인했다. 1958년 이후 평정기념비 행방은 사라졌다. 백록담 서벽 밑으로 밀어버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산악인 등이 수색했으나 여태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4·3사건 당시 토벌대와 무장대가 교전했던 제주시 아라동 관음사에는 토벌대 주둔소 흔적이 남아있다. 1949년 3월부터 잔여 무장대 토벌을 위한 2연대의 작전이 강화되면서 대대병력과 경찰 등이 주둔했던 곳이다. 2연대는 제주도의 곳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토벌의 근거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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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 주변에 규모가 큰 숙영지는 가로 세로가 각각 25m 규모이고, 서너 명이 잠복할 수 있는 초소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관음사 뒤편에는 숙영지와 초소가 비교적 훼손이 안 된 상태로 남아있다. 지금은 초소 등의 돌담은 무너져 내렸고 사이사이로 덩굴 식물 등이 자리 잡았다. 서귀포시 남원읍 수악주둔소는 40~50m의 돌담이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보전됐으며 숙영지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군경 토벌대 주둔소는 주민들과 무장대의 연결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1952년 4월에는 전도에 32개가량 있었다.
● 최대 격전지이자 피난처
한라산에서 기념비와 토벌대 주둔소를 제외하면 4·3사건을 시각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한라산은 최대의 격전지이자 피난처였다.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옆 어승생악은 일제강점기 진지동굴이 남아있다. 진지동굴은 4·3사건 당시 무장대의 아지트였다. 일본군이 남기고 간 총검 등은 무장대의 무기가 됐다. 1945년 10월까지 제주지역에는 일본군 5만 명이 주둔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상당량의 무기 등을 진지동굴에 넣어서 입구를 봉쇄하거나 땅에 묻었다.
1949년 7월 한라산 백록담 서벽 정상에 토벌대가 ‘평정기념비’를 세웠으나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1958년에 찍힌 평정기념비 마지막 모습으로 이후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현임종 씨 제공
경찰이 집계한 1950년 10월 1일부터 1951년 4월 22일까지 전과를 보면 무장대 사살 56명, 무기노획 소총 11정과 수류탄 2발 등이다. 당시 한라산 어승생악, 사라오름, 돌오름, 영실, 성판악 등에서 교전이 이뤄졌다. 현재 기록된 전과는 대부분 토벌대와 미군정 자료에 따른 것으로 사살되거나 생포된 사람 가운데 무장대원이 아니라 피신한 주민이 포함됐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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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대 피해자는 무고한 주민
군경토벌대와 무장대의 격전 속에 최대 피해자는 당시 주민들이었다. 1948년 11월부터 전개된 중산간(해발 200~600m) 마을 초토화 작전은 주민 2만여 명을 한라산으로 내몬 결과를 초래했다. 낮에는 토벌대, 밤에는 무장대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한라산으로 피신해 숨어 지내야 했다. 토벌대에 발각될 때는 무장대로 오인을 받아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현임종 씨(86)는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현 씨는 1948년 4·3사건이 발발한 해 겨울 제주시 노형동 고향 주민들과 함께 눈 덮인 한라산 아흔아홉골, 작은드레, 큰드레, 장구목 등지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그는 “군인들의 수류탄을 피해 바위 밑에 밤새 숨죽이고 있다가 날이 밝자 절벽인 병풍바위 옆으로 돌아서 올라가보니 이웃주민들이 여러 명 죽어있었고 아버지를 비롯한 몇 명만 주위를 헤매고 있었다”며 “죽은 사람들을 매장할 도구가 없어 부서진 쇠 조각으로 땅을 파 가매장을 했다”고 증언했다.
현 씨는 당시 아흔아흡골 등을 헤매다 업고 다녔던 세 살배기 어린 조카를 피난처에 놔 둔 채 군인에게 붙잡혔다. 현 씨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4기로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해 제주에 돌아온 뒤 1952년부터 한라산을 수시로 오르내렸지만 어린 조카를 찾지 못했다.
4.3유적 지도
토벌대 주둔소 가운데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수악주둔소는 2018년 6월 국가등록문화재 제716호로 등재돼 관음사주둔소와 더불어 4·3사건 유적 탐방지가 됐다. 무장대 총책이었던 이덕구가 은신했던 아지트(해발 640m)에는 당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깨진 무쇠 솥, 사기그릇 등이 남아있다. 이 곳은 ‘이덕구 산전’(山田)으로 불리며 현재 관련 단체 등의 교육 및 탐방코스로 활용되고 있다.
임재영기자 jy78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