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식인 임윤지당
2017년 강원 원주시가 풍천 임씨 직계후손의 얼굴 특징과 고증을 바탕으로 제작한 임윤지당의 초상화. 임윤지당은 18세기 조선 시대의 여성 성리학자로 ‘이기심성설’ ‘인심도심사단칠정설’ 등을 집필했다. 사진 출처 임윤지당얼선양관
이와 함께 최근 주목받는 한 여성 지식인이 있습니다.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任允摯堂·1721∼1793)입니다. 오늘은 임윤지당의 일생을 중심으로 18세기 여성의 삶과 학문 세계를 살펴보려 합니다.
○18세기 여성의 삶과 책 읽기
과부가 재혼하지 않도록 장려하는 단어도 등장했습니다. 남편이 일찍 죽어도 혼자 살면서 시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여성을 ‘열녀(烈女)’라고 부르면서 사회적으로 칭송한 것이죠. 훌륭한 양반 가문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급제자의 수만큼 열녀의 수도 중요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열녀는 급증했습니다.
이처럼 여성 차별이 극에 달했음에도 여성의 책 읽기와 글쓰기는 이전보다 보편화됩니다. 한글이 보급되면서 한글로 번역된 여성 수신서, 한글로 된 문학 작품을 읽는 여성의 수가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윤덕희의 ‘책 읽는 여인’이라는 그림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사대부로 추정되는 여인이 의자에 앉아 왼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으며 책을 읽고 있습니다. 물론 조선 시대에 여성이 글을 배울 기회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일부 양반 가문에서는 집안에 선생님을 모셔 남자들을 가르치며 여성에게도 참여할 기회를 주곤 했습니다. 하지만 한글과 기초적인 한자를 배워 문학 작품, 수신서 등을 읽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당시 여성에게 주어진 삶의 한계였죠.
○임윤지당의 삶
동생 임정주가 엮은 임윤지당의 문집 ‘윤지당유고’. 사진 출처 임윤지당얼선양관
임윤지당은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와 형제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임윤지당의 어머니는 파평 윤씨 노종파에 속했습니다. 이 가문은 독특한 자녀교육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직접 서당을 짓고 선생님을 초빙한 다음 10세 이상의 자제들을 한곳에 모아 공부하게 한 것이죠. 이 덕분에 임윤지당은 남자 형제들 틈에 끼어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임성주는 임윤지당이 공부에 재능을 보이자 평생 스승의 역할을 하며 공부를 도왔습니다.
임윤지당은 19세 때 원주의 선비 신광유와 혼인을 했습니다. 하지만 출산한 아이는 일찍 죽었고, 결혼 8년 만에 남편마저 사망했습니다. 후에 시동생 신광우의 아들 재준을 양자로 들였으나 그 역시 28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윤지당은 기구한 운명 가운데 시부모를 봉양하면서도 깊은 밤이면 보자기에 싸 두었던 경전을 펴고 낮은 목소리로 읽었습니다. 일상 속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에 가까운 친척도 임윤지당의 학문 세계를 잘 몰랐다고 합니다.
○임윤지당의 학문 세계
임윤지당은 시부모가 모두 세상을 뜨고 본인도 늙은 뒤 학문에 더 몰입하게 됩니다. 임윤지당이 성리학을 연구하고 쓴 글로는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 ‘인심도심사단칠정설(人心道心四端七情說)’, ‘극기복례위인설(克己復禮爲仁說)’ 등이 있습니다. 모두 조선 후기 남성 성리학자들이 치열하게 논쟁하던 주제였습니다. 임윤지당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 수준이 당시 대학자와 견주어 손색이 없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당시 대부분 남성 성리학자들은 특정 양반 남자들만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임윤지당은 남성 성리학자들처럼 치열한 논쟁과 학문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을 한탄하면서도 “내가 성인을 사모하는 뜻은 간절하다”고 당당히 표현했습니다. 이는 자신도 노력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남성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합격 후에도 서로 권력을 놓고 싸우는 경우가 많았죠. 대부분 남성 학자들이 학문의 목적을 ‘입신양명’에 둘 때, 임윤지당은 성인의 경지에 오르는 데 뒀습니다. 임윤지당의 사상을 정리한 ‘윤지당유고’를 읽어보며 ‘누구나 노력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의 학문세계를 알아보는 건 어떨까요?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