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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서지학회 오영식 회장 “우리 문헌 모은 학술지, 하버드대 사서도 찾아읽어”

입력 | 2020-01-22 03:00:00

창립 후 10년간 꾸준히 출간… 수집가와 연구자 가교 역할
분단-전쟁으로 문헌 소실 많아… 인문학 뿌리인 서지학 중요성 커
최초 근대 女작가 김명순 창작집 완전한 소장본 아직 찾는 중



서지학자인 오영식 근대서지학회장이 9일 서울 송파구 자신의 서재 겸 사무실에서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현상공모 당선작인 심훈의 ‘상록수’ 초판을 들고 있다. 근대서지학 회의 학술지 ‘근대서지’는 최근 20호로 창간 10주년을 맞았다. 오 회장은 “서지학과 근대 문헌정보의 정리는 학문의 기초와 뿌리인데도 우리는 오히려 소홀한 면이 있다” 고 지적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이번 호는 한 1400쪽 될 것 같은데?”(오영식 근대서지학회장·65)

“형님, 1300쪽이 넘는 걸 그냥 제본하면 책이 터져요. 이번에는 양장본으로 내자고요.”(박성모 소명출판 대표·57)

“아니, 무슨 학회지를 양장본으로 내?”(오 회장)

최근 창립 만 10년을 맞은 근대서지학회의 반년간 학술지 ‘근대서지’ 20호(2019년 하반기)를 소명출판에서 만들며 오 회장과 발행인 박 대표가 나눈 대화다. 결국 원고 하나가 다음 호로 미뤄져 양장본으로 발행할 필요가 없어졌지만 박 대표는 “제작비는 신경 쓰지 말라”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근대서지’는 우리 근대 문헌을 소개하면서 수집가와 연구자의 가교 역할을 하는 내실 있는 학술지로 손꼽힌다. 통권 17호에선 1929년 발행된 잡지 ‘중성(衆聲)’ 1권 3호의 유려한 표지 디자인이 시인 이상(본명 김해경)의 작품이라는 것을 새로 밝힌 글을 실었다. 일본의 판화연구자부터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의 사서까지 이 학술지를 빼놓지 않고 모은다. 4일 열린 20호 발간 기념회에는 회원과 연구자 등 70여 명이 몰렸다. 근대 문헌 수집가이기도 한 서지학자 오 회장을 9일 서울 송파구 개인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무실은 7단으로 책이 꽉 들어찬 서가가 줄지어 늘어섰다. 132m²(40평)쯤 되는 공간이 비좁았다. 이 사무실에 있는 책만 해도 2만 권이 넘는다. 귀중본 등 따로 보관한 것까지 모두 3만 권 정도 소장하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헌책방을 드나들었고, 서울 보성고 국어교사로 일하며(2017년 퇴임) 월급을 쪼개 40년 동안 모은 책들이다.

오 회장이 서울 불암산 아래 살 때 소장 자료 목록을 정리해 사비로 내기 시작한 게 12호까지 이어진 ‘불암통신’이다. 최초의 순문학 동인지 ‘신청년 3호’나 이육사의 시 3편을 새로 발견한 소식은 일간지 문화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다 오 회장 주도로 근대서지학회를 창립한 게 2009년. 초대 회장은 인류학자인 전경수 서울대 명예교수가 맡았다.

“누군가 근대 문헌의 원본을 안 보거나 잘못 인용했다고 가정해 보죠. 그 뒤 연구자들이 그걸 계속 재인용하면 끝내 원본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게 되지요. 사실 예전에는 국내 학문 풍토에서 이런 측면이 아예 없었다고 하기 어려워요. 뿌리인 서지학적 기초가 탄탄해야 인문학도 바로 섭니다.”(오 회장)

자료 정리가 학문 분야별로 오래전 진행된 일본에 비해 한국은 서지학의 중요성이 더욱 크다고 오 회장은 강조했다. 분단과 6·25전쟁을 거치며 수많은 문헌이 멸실됐고, 납북·월북 인사의 학문 연구가 오래 금기시된 탓이다. ‘숨은 자료의 공개와 공유’를 모토로 한 ‘근대서지’가 연구자들에게 단비가 되는 까닭이다. 최근에는 근대가요나 만화, 야구 등 체육사 연구자들도 이 학술지가 소개하는 자료에 주목하고 있다.

10년 동안 학회는 오 회장이 지은 ‘해방기 간행도서 총목록―1945∼1950’을 필두로 ‘책 잡지 신문자료의 수호자’(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총서 12권을 출간했다. 오 회장은 “근대문화유산인 출판물의 평가나 목록조사 사업 등에 서지 전문가가 반드시 함께 참여해야 오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퀴퀴한 옛 책 냄새를 사랑하는 까닭을 묻자 오 회장은 “헌책 수집 문화가 정착한 일본에서는 책 수집가를 은빛처럼 빛나는 흰 종이를 찾아다니는 ‘은어(銀魚)족’으로 부른다고 들었다”며 “인쇄본도 원본의 아우라가 있다”고 말했다.

“(신소설의 효시인) ‘혈의 루’ 초판은 (확인된 게) 어디에도 없고, (최초의 근대 여성소설가로 꼽히는) 김명순(1896∼1951)의 창작집 ‘애인의 선물’은 지금까지는 저만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삼국시대 역사책도 아닌데 말이지요. 한데, 제 것도 뒤에 낙장이 있어요. 완전한 책을 소장하신 분이 어서 나타나야 학자들도 완전한 소설을 연구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