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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 멱살[2030 세상/정성은]

입력 | 2019-11-12 03:00:00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온갖 운동에 도전했다 실패하는 편이다. 어디 운동뿐이랴. 삶도 포기투성이다. 책도 사놓고 안 읽고, 하루에 영어 한 문장 외우기도 신청해 놓고 안 하고, 유튜브 콘텐츠 만들기에 대한 인터넷 강의도 하나도 못 듣고 기간이 만료됐다. 묘비명에 ‘작심 3일로 평생을 살다 감’이라고 써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 내게도 매일 지키고 싶은 나와의 약속이 생겼으니 달리기다.

시작은 루틴(일상)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프리랜서 영상제작자인 나는 친구 회사에서 두 달간 일하기로 했다. 계약 전엔 ‘매일 출근이라니 끔찍하다’라고 하고 싶었는데 막상 출근하니 좋은 점이 더 많았다. 일단 회사는 가면 반은 성공이다. 적당히 감시하는 자도 있고 해야 할 업무도 있으니 일만 하면 된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과 일하니 배울 점도 많았다. 무엇보다 퇴근하면 더 일을 안 해도 된다는 것. 하지만 프리랜서는 아니다. 가장 큰 비극은 나 자신과 일해야 하는 건데, 놀고 싶은 나를 설득해 책상 앞에 앉혀 ‘셀프 멱살’을 잡는 게 얼마나 큰 에너지가 드는 일인지 깨달았다. 동시에 겁도 났다. 팀으로 일하는 즐거움을 알아버렸는데 두 달 후 다시 혼자가 되면 어떡하지? 그때를 대비해야 했다. 무언가 하나를 꾸준히 하다 보면 그것이 나를 지켜주지 않을까.

그래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첫날 죽을 것 같아 더는 못 하겠다며 시계를 보니 5분이 지나 있었다. 저질체력을 새삼 확인하고 가까스로 3km를 달린 뒤 결심했다. 매일 이만큼만 뛰자고. 다음 날 같은 코스를 달렸는데 어제보다 훨씬 덜 힘들었다. 하루 했다고 몸이 이렇게 기억하다니. 내일이 기다려졌다.

하지만 8일째 되니 슬슬 포기하고 싶어졌다. 1시간을 고민하다 걷는 걸로 타협하고 공원에 갔다. 그래도 기록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휴대전화 앱을 켰다. 3, 2, 1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그 소리를 듣는데 왠지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예측 가능한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홍제천을 따라 달렸다. 한강까지 가본 적은 없는데 오늘 한번 가 볼까? 30분 정도 달리자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음악을 들으며 열심히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들으며 영화 속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했고, 동경하던 아티스트의 음악을 들으며 ‘그 사람이라면 지금 포기하지 않았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몇 분을 더 달리니 드디어 한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 가장 멀리까지 오다니. 기쁘면서도 갑자기 서러움에 시야가 흐려졌다.

달리는 내내, 힘든 순간마다,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는 상상을 했다. 나보다 멋지고,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들을. 만약 그러지 않고 ‘나처럼 해보자, 나답게 뛰어 봐’ 했다면 벌써 포기했을 거다. 그런 생각들을 마주하니 머쓱해졌다. 달리기는 내가 고작 나인 걸 받아들이는 과정 같다.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야망은 이제 그만. 나로 잘 살아보자. 매일 조금씩 내 몸을 단련시키면서.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