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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계속돼야 한다[권용득의 사는게 코미디]〈10〉

입력 | 2019-10-22 03:00:00


권용득 만화가 그림

권용득 만화가

지난겨울 아내의 만화책 ‘두 여자 이야기’ 프랑스어판이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 공식 경쟁 부문에 올랐다. 그 덕분에 우리 집 세 식구는 예정에 없던 여행을 하게 됐다. 앙굴렘은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442km 떨어진 작은 성곽도시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대부분의 상점과 식당은 이미 불이 꺼진 상태였다. 게다가 숙소는 외딴 가정집이었다. 축제의 흥분 따위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혹자는 앙굴렘 만화축제를 만화계의 ‘칸 영화제’라고 하던데, 과장된 수사법이구나 싶었다.

이튿날 느지막이 일어나 아이와 함께 아내의 사인회 행사가 있는 출판사 부스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내가 혹시 사기 당한 게 아닐까 의심했다. 그런데 웬걸, 아내는 쉴 틈 없이 기계처럼 사인을 해대고 있었다. 앙굴렘 중심가는 세계 각지에서 만화축제를 즐기러 온 인파로 가득했다. 특히 프랑스 노년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어딜 가든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며 만화책을 꼼꼼히 살피는 노인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저자 사인본을 신줏단지처럼 받아들던 노인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아내에게 프랑스어로 이것저것 캐묻던 노인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껍데기만 노인일 뿐 하나같이 아이처럼 상기된 표정이었다. 정작 우리 집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는 하나도 없다며 줄곧 심드렁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노인들은 ‘68혁명’이라 불리는 대규모 사회변혁 운동의 주인공이다. 보수주의자의 시각으로 보자면 아무 데나 화염병을 던지고 남의 귀한 재산을 불태웠을 과격한 불순분자였을 테고, 진보주의자의 시각으로 보자면 세계를 뒤흔든 혁명의 주체나 다름없다. 양쪽의 평가가 어떻든 적어도 앙굴렘 만화축제를 즐기던 노인들은 세월의 풍파에도 자기만의 취미 생활을 지켜냈다. 반면 과거 군부독재를 무너뜨린 한국 사회 혁명의 주체들은 어떤가. 왜 그들은 혁명 후에도 취미 생활조차 가꿀 겨를이 없는 걸까. 그들의 혁명이 안타깝게도 매번 대의와 명분을 앞세운 정치 세력의 교체에만 그쳤다는 방증 아닐까.

물론 프랑스에서도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난겨울 앙굴렘 만화축제에서는 프랑스 아이들이 열광하는 ‘포켓몬스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몇몇 아이들은 포켓몬스터가 없다며 떼를 쓰기도 했는데, 그 아이들에게 앙굴렘 만화축제는 ‘핵노잼’이었던 셈이다. 언젠가 그 아이들의 불만이 68혁명처럼 폭발할 것이다. 그럼 그때 앙굴렘 만화축제는 내가 알던 앙굴렘 만화축제와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혁명은 저마다 취미 생활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계속돼야 한다.
 
권용득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