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본보, 시중銀 8곳 PB 통해 106명 설문
자산 20억 원을 보유한 60대 A 씨는 예·적금으로 굴리던 10억 원가량을 최근 선진국 은행이 발행하는 채권에 투자했다. 예·적금은 금리가 연 1% 안팎이지만 해외 채권은 연평균 5∼6%씩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A 씨는 “이제 현금성 자산으로 수익을 내긴 어렵다”며 “선진국 채권은 비교적 안전하면서 평균 투자 기간도 짧아 급할 때 유동화하기도 좋다”고 말했다.
저성장·저금리 기조에 미중 무역전쟁 등으로 투자자들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자산가들은 향후 1년간 채권형·해외주식형 펀드 등 금융투자 상품의 비중을 부동산보다 늘릴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 자산가들은 금융자산의 연 수익률(5∼6%)이 부동산(3∼4%)보다 높을 것으로 전망했다. 또 장기적으로 국내 경기가 악화될 것을 대비해 국내에서 돈을 빼 해외 자산을 늘리고 있었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7, 8월 신한·KB국민·KEB하나·우리·IBK기업·NH농협·SC·씨티 등 시중은행 8곳의 프라이빗뱅커(PB)를 통해 자산 10억 원 이상인 투자자 106명에게 향후 투자계획을 설문했다. 설문 결과 자산가들이 향후 1년간 비중을 늘릴 3대 투자처는 채권형펀드(18.1%), 해외주식형펀드(14.6%), 국내 부동산(13.8%) 순이었다. 은행 예·적금은 5.9%에 머물렀다.
○ ‘와타나베 부인’처럼 ‘김 여사’, 해외로 돈 뺀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100억 원대 자산가 B 씨는 최근 국내 자산을 줄이고 베트남의 부동산과 주식에 대거 투자했다. B 씨는 “한국은 지금의 정책 기조가 전환되지 않으면 투자하기 어려운 황무지”라며 “법인세, 증여세 등이 오를수록 국내 자금은 해외로 빠지게 돼 있다”고 내다봤다.
이른바 ‘김 여사’로 불리는 자산가들은 저성장, 저금리 흐름이 굳어질 것을 대비해 국내에서 해외로 자산을 구조조정하고 있다. 설문 결과 인기 투자 지역은 북미(34.7%)와 동남아(20.4%)였다. 국내 경기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설문 결과 기준금리는 앞으로 1년간 현 1.50%에서 1.25%로 떨어질 것이란 의견이 압도적(62.3%)이었다.
김봉수 KEB하나은행 압구정역PB센터 지점장은 “한국 경제가 거의 멈췄다고 보고 해외 주식과 해외 부동산 펀드에 관심을 갖는 고객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채권형펀드는 불황기에 비교적 안전 자산으로 꼽히기 때문에 인기를 끄는 것으로 보인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가 설정액 10억 원 이상 펀드를 분석한 결과 지난달 22일 기준 국내 채권형펀드 274개에 올해 들어 11조2789억 원이 들어왔다. 채권형펀드에 투자금이 몰리면서 펀드 전체 설정액은 34조 원을 넘으며 연초의 두 배 수준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채권 투자가 끝물이라는 의견도 있다. 박승안 우리은행 TC프리미엄강남센터장은 “채권 금리가 이제 하락하고 있다”며 “채권형 펀드에 편입된 채권이 국공채인지, 최소한 A등급 이상인 회사채인지 면밀히 확인해 투자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 희소해진 신규 아파트 선점 경쟁
투자자들이 대체로 관망하는 이유는 시장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설문조사에서도 향후 1년간 주택가격 전망에 대해 ‘상승’(35.8%)과 ‘보합’(34%) 의견이 분분했다. 투자자들은 그러면서도 신규 분양 아파트 투자(38.4%)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박합수 KB국민은행 수석부동산전문위원은 “신축 아파트는 정부 규제에서 자유로운 데다 낡은 아파트에 지친 수요자들이 늘어 선호도가 강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은아 achim@donga.com·김형민·남건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