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영화제 25관왕… 29일 개봉 ‘벌새’의 김보라 감독
김보라 감독은 첫 장편영화 ‘벌새’로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전 세계 25개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엣나인필름 제공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공부 잘하는 오빠, 문제아인 언니와 사는 은희. 남자 친구와 후배, 친구와의 관계가 위태로울 때 유일하게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것은 한문 선생님 ‘영지’(김새벽)다. 은희의 일상에 생긴 작은 균열은 서울 성수대교 붕괴 사건으로 연결된다.
아주 보통의 중학생 은희가 겪는 다양한 사건과 감정을 통해 한국사회의 1994년을 그려낸 ‘벌새’는 디테일한 연출과 대사로 관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당신의 ‘1994년’은 어땠나요?”
“이탈리아에서도 최근 다리가 무너졌고 재난을 많이 겪은 일본 관객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줬다며 고마워했어요. 9·11테러로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생긴 미국 뉴욕 트라이베카 영화제 반응은 말할 것도 없었죠.”
또래 친구와 남자 친구, 가족과의 관계가 늘 어려운 여중생 ‘은희’를 연기한 배우 박지후.
유난히 시끄러웠던 대한민국의 1994년을 오롯이 화면에 옮기기 위해 장소와 소품 섭외에도 공을 들였다. 은마아파트 빈집을 기적적으로 확보했다. 김 감독 부모님 집과 여러 소품실을 전전하며 발견한 액자와 오래된 전집, 베란다의 식물로 은희네 집을 꾸몄다. 은마아파트와 개포동 아파트 상가 등은 재건축을 앞두고 고스란히 남아 있어 1994년의 정취를 스크린으로 옮길 수 있었다고 한다.
김 감독 개인의 유년 시절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4년간 시나리오를 세밀하게 고쳐 쓰는 동안 각색된 부분이 더 많아졌다. 그러나 영지 선생님이 은희에게 건넨 따뜻한 차 한 잔처럼 중학교 시절 학원 선생님이 건넨 ‘우롱차’의 기억은 영화에 고스란히 남았다.
은희가 여러 관계의 ‘붕괴’를 겪으며 성장하듯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지고 배가 침몰하는 재난을 겪으며 여전히 한국 사회는 성장통을 겪는 중이다.
“서구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열망은 조금 덜었으니 좀 더 건강한 방식으로 우리를 살릴 수 있도록 함께 고민했으면 해요. 우리는 너무 많이 달렸고 대단한 성취도 누렸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아팠잖아요.”
이서현 기자 baltika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