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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실마리를 찾아준 한 편의 영화[이즈미의 한국 블로그]

입력 | 2019-08-09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이즈미 지하루 일본 출신 서경대 국제비즈니스어학부 교수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는 한국과 일본의 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디아스포라로 두 나라 사람들이 각기 다른 입장에서 논의를 펼치며 서로를 비난하는 기사를 접할 때마다 슬프고 허무해진다.

그런 와중에 한 편의 영화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실마리를 찾았다. 8월 15일에 개봉될 정다운 감독의 건축 다큐멘터리 영화 ‘이타미 준(伊丹潤)의 바다’가 그것이다. 영화는 건축가이자 화가로 알려진 이타미 준의 삶과 건축세계를 자연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이타미 준의 본명은 유동룡(庾東龍)이다.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나 2011년 74세로 타계할 때까지 한국 국적을 간직하며 국제적으로 활동했다. 그는 일본에서 성장했기에 한국어는 다소 서투르지만 누구보다도 한국문화와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했다.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서 남들이 겪지 못한 차별도 받았지만, 그가 속한 두 문화를 이해하고 승화시켰기에 자신만의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은 모던하지만 야성미 넘치며 따스하다. 나는 그 사실을 영화를 통해서 체험할 수 있었다.

내가 이타미 준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원 시절, 한국 민화의 도록을 통해서였다. 소박하기 짝이 없는 그 민화 작품과, 소장가 이타미 준이란 세련된 일본 이름이 왠지 이어지지 않아 기억하게 됐다. 그 후 간간이 이타미 준의 이름과 글을 접했으나 그의 삶이나 철학, 그리고 작품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이 영화를 통해서 이제야 그를 제대로 만날 수 있게 돼 기뻤다. 그의 존재는 디아스포라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믿을 만한 길잡이가 됐다.

영화는 안개가 자욱한 물가에서 시작한다. 조용한 음악 속에서 초목의 거미줄에 맺힌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숲 속에서 한 어린아이가 나타나 우리를 바다로 이끌어 간다. 바다에선 해가 지고, 또 해가 떠오른다. 그런 자연 속에서 그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방주교회, 수풍석(水風石) 미술관, 여백의 집, 포도호텔 등이다. 그 공간 속에서는 시간이 조용하게 흐르며 건물의 숨결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다가온다. 나는 영화 속 뛰어 다니는 아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엄마처럼 스크린 속으로 따라 들어가 그곳에서 아이와 함께 공간을 체험했다.

영화는 건축을 스크린을 통해 비춰 그려내고 있었지만, 그 영화 자체가 치밀하게 구성된 건축과도 같았다. 도면을 그리고 그 전경을 부감하다가 각도를 달리하며 부분을 클로즈업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데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두 딸의 시선,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이타미 준의 인간성과 믿음직한 작업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리고 진정성 있는 목소리를 지닌 배우 유지태의 내레이션, 이타미 준의 디아스포라성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양방언의 음악, 그리고 제주도 땅에 퍼지는 최백호의 노래가 모두 하나가 돼 이타미 준의 깊고 커다란 바다를 창조해냈다.

나는 수많은 그의 작품 속에서 초기 대표작이자 본인의 도쿄 사무실인 ‘먹의 집(墨の家·1975년)’에 끌렸다. 길고 갑갑한 어두운 방이 어쩌면 그의 마음속 깊은 어둠을 나타내는 듯했다. 그의 창작의 원점이 블랙홀 같은 그곳에 있고, 어두움이 있기에 작품에 깊이가 더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젊은 시절 그는 일본에서는 ‘조센진(朝鮮人)’, 한국에서는 ‘일본인’이라 불리는 자신을 이방인이라 슬퍼했다. 그리고 고독한 자신을 항상 ‘검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배’로 비유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이 아름다운 것은 어두움을 극복해서가 아니라 어두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위에 노력해서 얻어진 힘이 빛이 되어 비치고 어두움과 대비를 이루었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는 디아스포라의 고뇌를 스스로 뛰어넘어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한편 이타미 준의 회화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 ‘심해(心海)’가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의 웅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된 스물다섯 점의 작품은 그가 좋아했던 바다를 모티브한 것으로 영화와 함께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게 해준다.

정 감독은 8년이란 긴 세월 끝에 완성한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됐으면 싶다고 한다. 아름다운 건축 다큐멘터리와 회화 전시를 통해 두 문화를 끌어안아 디아스포라의 어려움을 뛰어넘은 한 거장 예술가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어쩌면 지금 시기를 극복하는 또 다른 시간이 될 것이다.


이즈미 지하루 일본 출신 서경대 국제비즈니스어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