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시대 누진제 등 국민 희생으로 한국 경제는 급성장할 수 있게 돼 최근 혹서기 전기요금 누진제 완화 논란 공기업의 존재 이유 다시금 되묻게 해…‘국민 삶의 질’보다 ‘주주 우선’은 공허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주택용이 산업용 및 상업용과 비교해 비싼 누진제를 적용받는 전기요금 체계는 석탄 한 줌이 아쉬웠을 산업화 시기에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정부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정부는 1970년대 석유 파동을 거치면서 산업용 전기를 더 확보하고 주택용 전기의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차별적 누진제를 실시했다. 누진제는 전기 수요가 많은 여름과 겨울에 요금 폭탄의 원인이 됐고, 부모 세대에게 에어컨을 켜서는 안 되는 이유를 제공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에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국민의 양보와 희생을 바탕으로 한국 경제는 수만 배 커졌고, 전기 공급 사업자인 한전도 최대 공기업의 하나가 됐다. 그 사이 환경 파괴와 기후변화로 인해 더위는 시골에서 부모와 이웃의 보호를 받는 시골 소년의 하루 놀잇거리가 아닌 사회적 약자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치명적 위협이 됐다. 더위 없는 쾌적한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국가가 나서서 보장해 줘야 하는 기본권의 문제로 변했다.
이번 혹서기 전기요금 누진제 완화 논란을 보면서 2019년 한국 사회에서 한전을 포함한 공기업(公企業)의 존재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공기업은 국민경제에 이바지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됐다. 그 과정에서 국민 삶의 질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전기와 에너지처럼 국민 삶의 질과 직결되는 부문에서조차 적자를 따지고 주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한전 경영진의 태도가 과연 공기업의 존재 이유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다. 한전이 흑자의 황금기를 구가하는 동안 약자를 보호한다는 감동적인 뉴스를 접한 적이 없다. 경남 밀양 주민의 울부짖음을 외면한 채 마을 한가운데 전신주를 박을 때만 공동체를 앞세우고 7, 8월 두 달간 월 1만 원을 할인해주는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 가결을 놓고 주주 이익을 염려하는 한전을 보면서 입맛이 쓰다. 공기업이 사기업처럼 이윤의 극대화와 효율성만을 추구한다면 국민 삶의 질은 안중에도 없는 공기업(空企業)이 아닐까? 한전의 인프라 구축을 위해 살던 동네를 떠나거나 불편과 위험을 감수했던 우리 부모 세대는 누굴 위해 그러한 희생을 한 것일까?
내가 자란 고향에서는 이제 아이들 소리가 들리지 않고 노인들은 마을회관 에어컨 밑에서 함께 음식을 해 먹으며 하루를 보낸다. 공기업(公企業)이 공기업(空企業)이 되지 않으려면 시골에 아이들이 없고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노인만 있는 현실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