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원 출신 마술사 정재호 씨와 법무부 주무관 손경수 씨
정재호 씨(왼쪽)와 손경수 법무부 소년보호과 주무관이 마술용 카드를 펴 보이고 있다. 정 씨는 서울소년원에서 만난 손 주무관의 지도로 마술사의 길을 걷고 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무대에 오른 이는 서울소년원 출신 마술사 정재호 씨(20)다. 정 씨는 지난달 31일 형사정책연구원 3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받아 마술 공연을 시작하며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려 했다. 헝가리에서 발생한 유람선 침몰 사고로 갑자기 공연이 취소됐지만 정 씨는 무대 위 상황을 머릿속에 여러 차례 그리며 그날 공연을 고대했다. 올해 동아보건대 마술학과를 졸업한 정 씨에게 법무부나 소년원이 주최하는 행사는 남다르다.
○ “남을 행복하게 하는 속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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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주무관은 서울소년원 직업훈련 과정 중 ‘매직엔터테인먼트반’을 운영했다. 마술에 관심이 없던 정 씨는 손 주무관의 동전마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저 신기했다. “우리 반에 정말 훌륭한 친구가 들어왔어요.” 손 주무관은 서툴기만 한 정 씨를 친구들 앞에서 끊임없이 칭찬했다.
얼마 뒤 서울소년원 행사에서 정 씨는 10분 정도 마술 공연을 했다. 200여 명 앞에 선 것도, 무대 위에 올라간 것도 처음이라 무척 떨렸다. 정 씨는 “공연이 끝나고 박수를 받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다”며 “그때부터 더 열심히 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 씨에게 마술은 남들을 행복하게 하는 속임수다. 정 씨는 “거리에서 공연할 때면 꼭 ‘에이 사기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기는 피해를 주지만 마술은 웃음을 준다. 바쁜 탓에 서로 얼굴도 보기 힘든 가족을 한자리에 모아주기도 한다”며 웃었다.
정 씨는 소년원에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울 때도 늘 동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공연 때 쓸 대본을 노트에 빼곡히 적어 손 주무관에게 검토를 요청했다. 무언가를 그렇게 열심히 해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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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다시는 실수하지 말자”
정 씨는 지난해 전국 코인 마술 경연대회에서 1위를 했다. 마술사들이 심사하는 대회에서 정정당당하게 우승한 것이다. 자연히 정 씨를 찾는 곳이 많아졌다. 하지만 정 씨에게 가장 중요한 일정은 소년원 후배들을 만나는 일이다.
그는 “소년원이 내 집이었고 그곳에서 많이 배웠기 때문에 아무리 출연료를 많이 주는 행사가 있어도 소년원 재능기부가 우선”이라며 웃었다. 정 씨는 소년원 후배들에게 마술로 친근하게 다가간 뒤 “나도 그랬지만 다들 운이 나빠 여기 들어왔다고 생각하지? 근데 우리 모두 잘못한 것 맞잖아. 다시는 실수하지 말자”고 말한다.
정 씨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 손 주무관에게 물었다. “선생님, 친구들에게 제 출신을 숨기는 것만이 답은 아닐 것 같아요. 이렇게 소개해 볼까 하는데 어떨까요?” 정 씨는 자신이 쓴 대본을 손 주무관에게 내밀었다. 손 주무관은 정 씨가 세상의 편견과 싸우면서 무수한 상처를 입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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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10개 소년원에서 대학에 진학한 학생은 86명으로 2013년(45명)의 두 배 가까이로 늘었다. 법무부 관계자는 “소년원 안에서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기능경기대회 수상 실적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재범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