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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연욱]카자흐스탄 비핵화 모델

입력 | 2019-04-23 03:00:00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하면서 신생 독립국이 된 카자흐스탄은 난데없는 핵무기 강국이 됐다. 소련이 연방 국가에 분산 배치했던 핵무기의 소유권이 넘어왔기 때문이다. 세계 4대 핵무기 보유국이 된 카자흐스탄은 당시 전략핵무기 1410개, 대륙간탄도미사일 104기를 보유했고, 대량의 플루토늄과 고농축우라늄 등 핵물질도 갖고 있었다. 소련 시절 한적한 변방국가가 핵무기의 ‘화약고’로 급변한 것이다.

▷카자흐스탄은 신속하게 비핵화의 결단을 내렸다. 핵 대신 경제 발전 노선을 선택한 것이다. 소련이 카자흐스탄 땅에서 450회 이상 실시한 핵·수소폭탄 실험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비핵화 열망도 감안됐다. 이후 핵무기는 러시아에 넘겨서 폐기 절차를 밟았고, 그 대가로 미국은 ‘넌-루거 프로그램’을 통해 16억 달러 규모의 경제 지원을 했다. 이후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 비핵지대화 창설을 주도하면서 경제 부흥에 성공했다. 그래서 비핵화의 성공 모델로 꼽힌다.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국빈 방문 중인 카자흐스탄을 ‘모범적인 비핵화 국가’라고 평가했다. 일각에선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주창하는 ‘리비아 모델’에 선을 그었다는 관측이 나온다. 리비아는 핵물질을 2004년에 미국에 넘겼고, 경제 지원 등 보상은 이보다 2년 뒤에 이뤄졌다. 미국이 하노이 회담에서 북한에 제안한 비핵화 완료와 동시에 제재 해제 및 보상이 이뤄지는 ‘일괄타결’ 방식과 비슷하다.

▷카자흐스탄이나 리비아 모델 모두 북한 핵 문제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얼떨결에 소련의 핵무기를 넘겨받은 카자흐스탄과 달리 북한은 핵무기를 직접 개발했다. 핵 개발에 수십 년이 걸렸고 그 수준도 상당히 고도화됐다. 게다가 카자흐스탄과 마찬가지로 소련에서 넘겨받은 핵무기를 포기했던 우크라이나가 2014년 러시아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도 악영향을 미쳤다. 리비아 모델에 대해선 북한은 더 예민하게 거부감을 표한다. 북한은 리비아 카다피 정권이 붕괴한 결정적 이유가 핵 포기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핵 포기=체제 붕괴’라는 생각이 강하다. 김정은이 유독 핵 능력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카자흐스탄 비핵화를 주도했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대통령은 평소 북-미 대화의 중재자 역할을 맡겠다고 말해 왔다. 카자흐스탄 모델을 토대로 ‘핵 대신 경제’ 비전을 설명하겠다는 얘기다. 김일성부터 3대에 걸쳐 가까스로 ‘핵보검’을 거머쥔 김정은이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일지는 모르겠지만.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