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수 사회부 차장
대법원의 ‘인신 구속 사무의 처리에 관한 예규’에는 기각 사유를 간략하게 기재하도록 돼 있다. 부득이 두 줄을 넘기면 판사가 별지(別紙)에 기각 사유를 적은 뒤 그걸 청구서에 오려 붙여 간인한다. 서울동부지법 박정길 영장전담 부장판사도 지난달 26일 오전 2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의 직권남용 혐의 등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청구서에 별지를 붙였다. 당시 법원 측은 별지를 사진으로 찍어 취재진에 보냈고, 일부 언론이 이를 그대로 보도했다. 692글자가 A4용지 절반 분량에 19줄로 적혀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일부 판사들은 뒤늦게 이를 구해 돌려 보고 있다. 30년 넘게 판사로 근무한 고위 법관은 최근 카카오톡으로 이 별지를 받아 봤다고 한다. 그에게 소감을 묻자 “내 평생 이런 기각 사유는 본 적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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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내부에선 애물단지 같은 ‘별지 기각 사유’를 이참에 없애자는 주장이 나온다. 영장전담 판사가 별지에 범죄 사실에 대한 소명이 없다며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썼는데, 그 전에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수사 기록에 해당 소명이 포함된 사실이 드러난 경우도 있다. 이에 한때 영장전담 판사들은 “기각 사유를 보완하면 발부해 주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검찰을 자극해서 수사 기한만 늘린다”며 기각 사유를 간단히 쓰자고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1997년 영장실질심사제도가 처음 도입될 당시 만들어진 대법원 예규엔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지향하는 무죄 추정과 불구속 수사 및 재판이 대원칙으로 돼 있다. 불구속이 원칙, 구속이 예외라는 것이다. 예외에는 이유를 달아야 하지만 원칙대로 처리한 업무에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영장청구서엔 발부 이유를 적는 빈칸이 없다. 왜 기각 사유만 쓰게 됐을까. 전직 영장전담 판사는 “피의자가 아니라 수사 기관에 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기각 이유가 짧다고 항의할 피의자가 얼마나 있을까. 검사가 청구하는 영장을 법원은 으레 발부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여기던 시절에 만들어진 청구서 양식부터 바로잡자고, 법원이 먼저 법무부에 요구해야 한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