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아들-딸 佛장관-의원으로 키운 오영석 前 KAIST 교수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근무하다 1978년 프랑스로 건너간 오영석 전 KAIST 초빙교수가 5일 파리 5구 호텔 로비 의자에 앉아 있다. 2004년부터 한국에 거주 중인 오 전 교수는 아들의 장관 취임 소식을 듣고 얼굴을 보러 잠시 파리를 찾았다(왼쪽 사진). 지난해 9월 한국에서 열린 오 전 교수 칠순 잔치 때 한복을 입은 세드리크와 델핀 남매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오영석 전 교수 제공
―프랑스에도 외국인에 대한 장벽이 있었을 텐데 자녀를 키우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오히려 프랑스식과 한국식 교육을 섞은 게 큰 도움이 됐어요. 한국 교육은 목표 지향적이에요. 자연스럽게 아이를 크게 하는 프랑스보다 성과가 크죠. 그 대신 프랑스 교육은 그 목표에 다가가는 방법을 강조해요. 철학적인 생각을 중시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죠.”
―교육 비법이 있나요.
“대화, 독서, 여행이죠. 스스로 장래를 잘 결정하려면 경험이 중요합니다. 경험은 망루의 높이와 같아요. 망루가 높을수록 멀리 볼 수 있잖아요. 높은 곳에선 훨씬 많은 것을 보며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죠. 여행을 통해 직접 보고 느끼고, 책을 통해 간접경험을 하고 대화를 통해 부모의 경험을 수용하도록 하죠.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후 8시에는 집에 들어가려고 노력했어요. 집에는 TV를 들이지 않았어요. 저녁시간에 모여서 대화를 했죠. 별 내용도 아니에요. 학교생활에서 있었던 일 같은 거예요. 저녁 식사에서 가족 4명 모두 할 말이 많았어요. 그리고 매일 밤 꼭 같이 책을 읽었어요. TV는 보다 보면 은연중에 세뇌당하지만 책을 읽으면 비판력이 생기거든요.”
“아이들에게 ‘너희 인성은 내 책임이지만 장래는 내 책임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그건 너희가 결정할 문제라고요. 부모는 조언자이지 결정자가 아니에요. 아이들에게 말했어요. 살다 보면 인생에서 여러 문이 나오는데 이 문들은 꼭 자기 손으로 열어야 한다고요. 남이 열어주는 문은 딱 하나, 관 뚜껑뿐이라고 했죠. 하나 덧붙인다면 매너 교육을 많이 시켰죠. 중요한 건 내가 할 줄 아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움직여 나하고 함께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해야 한다고요.”
―세드리크의 어릴 때 꿈은 무엇이었나요.
“한결같이 군인이었어요. 영택이 외증조부가 샤를 드골하고 동기인 군인이었어요. 영택이 고교 졸업 직전에 가족이 일본 히로시마로 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전쟁, 군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히로시마 원자폭탄 기념관에 다녀온 뒤 전쟁이 세계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생각이 달라진 것 같아요. 이후에 군의관이 되려고도 했는데 시력이 워낙 안 좋아서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고등상업학교(HEC)를 택했죠.”
HEC는 프랑스 최고의 그랑제콜 중 하나다. 공부는 델핀이 더 잘했다고 했다. 델핀은 프랑스 그랑제콜을 나온 뒤 베를린자유대,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을 나왔다. 미국 싱크탱크와 주미·주한 프랑스대사관에서 근무한 그는 여당 국제관계 전문가로 꼽힌다.
“중3 때 리옹 집 근처에서 직업 박람회가 열렸어요. 한국에도 그런 기회가 많으면 좋겠는데 학생과 젊은이들에게 여러 직업을 알려주고 진로 상담을 해주는 거였죠. 수련이가 거기 다녀오더니 유엔 사무총장이 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후 국제관계 일을 하고 있어요.”
오 전 교수는 자녀들에게 신라시대 화랑 ‘관창’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했다.
“귀가 아프도록 많이 해줬어요. 국가에서 부름을 받았을 때 전력을 다해 봉사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죠. 그 영향인지 둘 다 소명의식은 투철합니다.”
1986년 5월 프랑스 북부 루앙 집 정원에서 양팔에 남매를 안고 즐거워하는 오 전 교수.
어린 시절 한복을 입고 있는 세드리크와 델핀.
그는 프랑스 제2 도시 리옹에서 박사학위를 딴 뒤 프랑스 국영 화학회사 론풀랑크와 국립응용과학원(INSA)에서 교수를 지냈다. 재불과학기술협회장도 지냈다. 자녀들이 다 큰 2004년부터는 KAIST 초빙교수를 지냈고 지금까지 한국에 머물고 있다.
세드리크와 델핀 모두 프랑스어와 영어는 물론 간단한 한국어도 구사한다.
“둘 다 연세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했어요. 제가 아내에게 그랬어요. 우리 애들은 프랑스인인 동시에 한국인이다. 프랑스에 살지만 2년마다 한 번씩 반드시 한국에 데리고 가겠다고요.”
―남매의 사이는 어떤가요.
“각별하죠. 수련이는 성격이 강한 편인데 오빠에게는 굉장히 잘해요. 오빠도 동생을 굉장히 잘 챙기고요. 영택이의 아내가 수련이와 동갑 친구예요. 영택이가 프랑스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동생을 만나러 한국에 왔다가 짝을 만났어요. 영택이가 연세대 교환학생으로 와 있던 HEC 후배 며느리를 보고 전기가 통한 거예요.”
둘은 한국에서 전통혼례로 결혼식을 했다. 며느리는 프랑스 유명 대형 레스토랑의 총지배인을 맡고 있다.
“며느리는 한국 음식을 저보다 더 잘 먹어요. 지난번에는 저에게 전화해서 우엉하고 노란 무 좀 사달라고 하더라고요. 김밥 만들어 먹겠다고요.”
지난해 델핀이 대한민국 국회에 초청 받아 한국에서 프랑스 정치에 대해 세미나를 한 뒤 아버지와 한 컷.
“영택이가 그러더라고요. ‘아버지가 저를 키워준 것처럼 제 자식을 키울게요’라고요. 제겐 가장 큰 찬사죠. 실제로 아들이 세 살배기 손자 성식이를 키우는 거 보면 제가 그 아이들을 키웠던 방식과 비슷해서 뿌듯합니다.”
오 전 교수는 손자 이름을 직접 지어줬다고 했다. “저랑 통화를 하는데 성식이가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해요. 한국말로 된 ‘뽀로로’를 보여주나 봐요. 8월에는 성식이 동생 둘째 손자도 태어난답니다.”
오 전 교수를 포함해 가족들은 3일 세드리크 장관 임명 축하 저녁을 함께했다. 주목받는 높은 자리에 오른 아들이 걱정되지 않을까.
“잘할 거예요. 아들이 신중해요. 마크롱 대통령 대선 캠프 창립할 때 연락이 와서 자기가 캠프 재정을 책임지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건 잘못하면 형사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신중하라’고 했죠. 나중에 보니 러시아로 추정되는 해커들이 영택이 이메일을 해킹하고 재정 문서를 유출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아들과 딸이 장관, 의원보다 더 큰 꿈을 꾸기를 바라나요.
“앞으로 뭐가 되라는 이야기는 절대 안 해요. 다만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궁극적으로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만 했어요. 잘할 거라고 믿습니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