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한국전쟁 참전기념공원의 ‘19인의 용사상’.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을 형상화한 이 조형물은 한미동맹이 혈맹임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사진 출처 한국전쟁참전기념공원 홈페이지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2008년에 발간된 ‘한국전쟁, 미군 병사들의 기록’은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 113명의 수기를 엮은 책이다. 60여 년 전 이역만리에서 자유와 평화를 지켜낸 참전용사들의 처절한 사투가 페이지마다 피로 쓴 듯 선연히 펼쳐진다. 지옥 같은 전장에서 적탄에 몸이 찢어지고, 수많은 동료들이 전사했지만 이들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한다. 공산세력의 침략에 맞서 한국군과 함께 목숨 걸고 대한민국을 구한 것은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혈맹의 기억은 책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6·25전쟁이 터지자 가장 먼저 전투부대를 파병하고 최대 규모의 병력을 보낸 미국에는 42개주에 140여 개의 6·25전쟁 참전 기념물이 건립돼 있다. 그 대표적 장소인 워싱턴 시내의 ‘한국전쟁 참전기념공원’에선 ‘혈맹의 산증인’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주요 기념일이면 미 전역에서 참전용사들이 찾아와 먼저 떠나보낸 전우들을 추모하며 감회에 젖는다. 몇 해 전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 취재차 이곳을 찾은 필자가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반갑게 악수를 건넨 백발의 노병도 6·25전쟁 참전용사였다. 그는 가슴에 단 무공훈장들을 가리키며 “내 청춘을 바쳐 한국을 지켜낸 징표”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피로 일궈낸 한미동맹의 가치와 전통이 세대를 이어 간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방위비 분담금 갈등도 악화일로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걸고 내년에도 더 많은 돈을 한국에 요구할 것이 확실시된다. ‘미군 주둔 비용의 150%(3조 원 이상)’를 제시할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판국이다. ‘동맹’보다 ‘돈’을 앞세운 미국의 압박이 노골화될수록 주한미군의 위상과 지위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미동맹의 ‘주춧돌’인 주한미군의 ‘용병화’는 한국 내 반미 감정을 촉발시켜 종국엔 철수나 감축 사태로 비화될 소지도 있다. 6·25전쟁 참전용사의 ‘후예’인 주한미군이 ‘흥정거리’로 폄하되면 북한과 중국, 러시아는 이를 한미동맹 약화의 결정적 징후로 보고 그 틈을 집중 공략할 수 있음을 미국은 직시해야 한다.
주요 연합훈련의 중단 사태도 우려스럽다. 북한 비핵화는 전혀 진척이 없는데도 3대 연합훈련(키리졸브, 독수리훈련, 을지프리덤가디언)을 폐기 및 축소한 것은 한미 군사동맹의 근간을 허무는 악수(惡手) 중의 악수다. 한미 군 당국은 연합 방위태세에 문제될 게 없다고 강변하지만 이 상태로 몇 년이 지나면 연합작전 능력은 크게 저하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훈련을 도외시한 군사동맹은 ‘껍데기 동맹’ ‘무늬만 동맹’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쓴소리에 한미 양국은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남북, 북-미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 해결 등 한반도 평화 구축 과정에서 한미동맹에 대한 도전과 변화는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 과정이 동맹의 요체와 기반을 흔드는 ‘자해행위’여서는 곤란하다. 더구나 국내 정치적 명분과 경제적 실리를 위해 동맹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은 양국 모두에 득이 되지 않는다. 11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이 동맹의 현주소를 냉철히 진단하고 크고 작은 간극을 메워 완벽한 대북 공조체제를 복원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그것은 60여 년 전 대한민국을 피로 지켜낸 혈맹의 수호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