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앤드루 숀 그리어 지음·강동혁 옮김/324쪽·1만4000원·은행나무
2018 퓰리처상 수상작 ‘레스’의 주인공 아서 레스는 자신이 늘 스포트라이트에 비켜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홀로 떠난 여행에서 자신만을 향하던 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림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한 장면을 담은 황정호 작가의 일러스트. 은행나무 제공·ⓒ황정호(Teo Hwang)
“선생이나 우리는 천재를 만나봤죠.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람들 같지 않다는 걸 알잖아요. 자기가 천재가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계속 살아간다는 건 어떤가요? 내 생각엔 그게 최악의 지옥인 것 같아요.”
누군가 레스에게 건넨 말. 그는 오랫동안 함께한 파트너와 이별하고 충동적으로 세계를 일주하고 있다. 그동안 거절해 왔던 문학 관련 행사에 모두 참석하기로 하면서 여행은 시작됐다. 뉴욕에서 유명 작가를 인터뷰하고, 멕시코에서 문학 콘퍼런스, 이탈리아의 문학상 시상식,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5주간의 강의, 프랑스 파리를 경유한 뒤 모로코 인도 일본을 거치는 여정. 책은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해프닝을 통해 레스를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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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분명 비참하고 절망적이어야 하는데,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피식피식 웃음이 터진다. 프리랜서 작가의 삶을 “따뜻하긴 한데 발가락까지는 절대 덮어지지 않는 조각보”라고 표현하거나 자신이 참석한 이탈리아의 시상식을 “자기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마련하는 슬픈 닭싸움”이라고 하는 등 시니컬하면서 연민을 자아내는 비유가 반짝인다. 우디 앨런 영화에 나올 법한 자학적 유머에, 독자는 비참한 레스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점점 그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게 된다.
레스의 친구 조라는 “백인 중년 남자의 삶을 가여워하긴 쉽지 않다”고 하지만, 책은 재치 있는 화법으로 그걸 해낸다. 게다가 소설가에 관한 소설이라니 왠지 자기 연민 아니면 자화자찬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큰 사건은 없지만 담담하게 털어놓는 사건들 사이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고독과 불안,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찰나의 행복이 펼쳐진다. 삶의 의미는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명예를 얻는 때가 아니라 사소한 마들렌 향기에서 피어난다는 것처럼 말이다. 소설가 김봉곤은 “마르셀 프루스트가 샌프란시스코에 살았다면 바로 이런 소설을 썼을 것”이라고 했다.
이 책의 절정은 베일에 휩싸인 화자다. 세계를 돌아다니는 레스를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묘사하고 있는 사람은 책 3분의 2 지점 즈음 서서히 정체를 드러낸다. 그가 늘어놓는 신랄하고 톡톡 튀는 비유의 향연을 즐기다가 마지막 순간엔 감동의 미소를 짓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