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적벽’(위쪽 사진)의 삼고초려 장면에서 제갈량 역할을 맡은 여배우 임지수가 유비 세력에의 합류를 앞두고 고민하고 있다. 아래쪽 사진은 남녀 버전이 따로 있는 연극 ‘B클래스’에서 노래와 작곡을 연습하는 남자 캐스팅 버전. 정동극장·스탠바이컴퍼니
공연 무대 위에서 ‘성역(性域)’이 사라지고 있다. 최근 성 역할 고정관념을 깨는 ‘젠더 프리·크로스 캐스팅’ 작품이 잇따라 막을 올렸다. 젠더 프리·크로스 캐스팅이란 기획 단계부터 역할에 성별을 따로 구분하지 않거나 배역을 남성, 여성이 번갈아가며 연기하는 것을 뜻한다.
연극 ‘함익’도 대표적인 케이스. 재벌 2세에 대학교수 신분으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30대 여성 함익. 그러나 정작 그녀의 마음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걸 가졌지만 늘 심리적 고독으로 고뇌하는 자. 어디서 본 듯 익숙한 이 배역은 셰익스피어 고전 ‘햄릿’의 한국형 캐릭터다. 남성 배역으로 굳어져 있던 햄릿은 무대에서 여성으로 다시 탄생했다. 뮤지컬 ‘해적’은 심지어 모든 배역을 혼성으로 캐스팅했다. 무대에 등장하는 2명의 배우가 각각 1인 2역을 소화하며 기존 해적의 이미지에서 탈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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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함익’에선 함익을 맡은 최나라 배우가 자신의 분신을 소환하는 장면을 연기하고 있다. 분신 역할을 맡은 ‘익’은 이지연 배우가 맡았다. 서울시극단 제공
수년 전부터 늘어난 ‘젠더 프리’ 캐스팅은 성공적이란 평가가 많다. 하지만 기계적인 성 역할 전환에 앞서 작품의 질에 대한 고민이 동반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관객들의 젠더 프리 캐릭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배역도 주변 인물로 한정돼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연 평론가인 원종원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는 “젠더 프리 캐스팅 자체가 성 역할 고정관념 개선에 도움을 주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돼선 안 된다”며 “캐스팅이 관객의 흥미를 자극하고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