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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세상/오성윤]소탈과 제멋 사이의 중도

입력 | 2019-02-20 03:00:00


오성윤 잡지 에디터

한동안 부엌 찬장에 라면 분말 수프를 쟁여 두곤 했다. 회사 근처 부대찌개집에서 라면사리를 주문하면 인스턴트 라면을 봉지째 제공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 점포를 위해 개발된 상품인 ‘사리면’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몰라도, 하여간 자취인에게는 감사한 일이었다. 주머니에 넣기 전에 동석한 사람들에게 묻기는 했다. ‘라면 수프 남는데 필요한 분 있나요?’ 다들 웃으며 손을 내젓곤 했기에 질문은 점차 ‘필요 없죠?’의 형태로 변했고, 서너 번 반복한 후에는 아예 묻지 않게 됐다. 그 다음 단계도 있었다. 질문이 역으로 나에게 돌아왔던 것이다. 여느 날처럼 식사를 마치고 외투를 입는데 한 후배가 속삭이듯 물어왔다. ‘선배, 이거 안 챙기시나요?’ 그의 손에는 라면 수프 두 봉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나이나 성별, 직급 같은 사회적 정체성을 예민하게 의식하는 방향으로 철들지 못했다. 사실 그런 조건들이 무의식적으로나마 언행에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늘 경계해왔다. ‘어른스러운’ ‘남자다운’ ‘고참다운’ 형식에 익숙해지면 삶은 역할놀이의 범주로 접어들며 한층 피곤하고도 헛되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라면 수프 에피소드를 듣는 지인들은 대개 이야기의 핵심을 ‘혼자 사는 30대 중반 남성의 궁상’이 ‘후배’에게 까발려진 ‘체면 문제’로 받아들였지만, 사실 내게 체면이야 아무래도 좋았다는 뜻이다. 내가 당황한 이유는 20대인 그 후배도 자취인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라면 수프를 유용한 아이템으로 여기는지는 몰랐지만 중요한 건 그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표현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었고 내가 그걸 전혀 고려치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위계 의식을 싫어하는 나는 ‘소탈한’ 어른이 될 수도 있겠으나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제멋대로인’ 어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느낀 건 스스로가 그 갈림길 ‘어드메’에 서 있는 듯한 위기감이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설 특집 TV 예능 프로그램의 내용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고 했다. 새벽 운동에 보좌관을 불러내거나, 공식석상에서 안내를 따르지 않고 내키는 대로 움직이고 앉거나, 동의도 없이 부하 직원의 공개 구혼 영상을 찍거나, 업무가 일찍 끝난 날 부하 직원의 가족 외식 자리에 끼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의 소통 방식에 탄식했다.

다만 그게 ‘갑질’이라는 평가는 의아했다. 그게 권위의식의 발로였을까? 어쩌면 스스로는 격의 없고 소탈한 면모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둔한 것이다. 힘을 가진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행동이 의도와는 무관하게, 배경이나 권력에 의해 의미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명민함이 수반되지 않은 소탈함은 그저 자기 객관화가 부족한 상태일 뿐이다.

때로는 자신의 위치를 잊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권력의 방증이다. 그러니 소탈한 상사가 되겠다고 혼자만 격의 없고 혼자만 허심탄회하지 말라. 그건 폭력이니까. 업무 지시자이자 감독관인 사람이 동시에 편한 사람이 되겠다는 건 애초에 굉장히 어려운 목표다. 부단한 고민과 배려를 각오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사무적인 상사가 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오성윤 잡지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