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발전했는데 시민성은 제자리, 일방적 교육은 ‘수동적 시민’만 낳아 사회 참여와 시행착오 경험 쌓일 때 문제제기-토론 꽃 핀 생활민주주의 성숙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정치사회학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 노인의 관계 중심적 일상은 민주주의의 질적 성숙에 필요한 시민성을 촉진하는 데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다. 시민성은 교류를 통해 서로를 배려하고 관용하면서 실천하는 시민을 지향한다. 한국의 노인은 정치에 관심도 많아, 일상생활과 정치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계기가 자발적 결사체에서 자연스럽게 마련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민성은 일상에 좀처럼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를 두고 대부분 국회의 무능, 정치의 독주와 제도, 사법부의 권위 상실 등 정치의 타락과 제도의 미흡을 탓한다.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취약한 시민성을 설명하는 데 부족하다. 그 이유는 자신의 이익만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목소리 큰 ‘진상’의 얼굴은 폭정에 맞서 광장에서 싸워 온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이 변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의 질적 도약은 없다. 그래서 한국 민주주의의 진짜 위기는 일상에서 자라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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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성은 현재 정치권과 시민단체,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의 시민교육으로 단기간에 형성되지 않는다. 주입식 교육으로 향상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시민을 교화의 대상으로 보는 일방적 교육은 이들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 함께 참여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시간을 두고 축적된 시민성만이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끌 수 있다. 이제 시민교육에 세금을 낭비하지 말자. 차라리 그 돈으로 주민들이 함께 어울릴 텃밭을 분양하는 게 더 낫다.
시민성과 관련해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준법과 질서가 시민성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법질서 준수는 사회가 적절히 기능하기 위해 필수적이지만, 법치만으로 시민성 형성과 민주주의의 성숙이 성취되지 않는다. 법과 질서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오히려 불합리, 불공정, 불투명에 대한 정당한 문제제기를 가로막고 불평등을 지속하게 만든다. 법질서 준수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권리와 의무의 균형, 자율성의 가치, 다른 의견과 신념에 대한 관용과 공감, 적극적 참여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권위주의 문화가 지배적이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몰상식이 상식으로 둔갑한 사회에서는 불편함과 무례함을 통해 시민성이 촉진될 수 있음을 명심하자. 사회학자이자 작가인 정수복 씨는 한국인이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격론을 벌이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처럼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서는 갈등과 불편함을 통해 작동하는 시민성이 더 필요하다. 개인적 예의 바름이나 불편한 상황을 부드럽게 만드는 시민적 기술 또는 순응적 사회성은 일상 세계의 민주주의를 저해한다. 내부고발자가 확실하게 보호되는 조직일수록 투명성과 공공성이 향상되는 것처럼, 불편함을 무릅쓰고 무례할 수도 있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관용하고 그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문화가 조성된 사회일수록 민주주의의 질이 높아진다.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