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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담배회사는 왜 질병 연구를 후원할까

입력 | 2018-12-08 03:00:00

◇우리 몸이 세계라면/김승섭 지음/348쪽·2만 원·동아시아

‘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교수, 논문 1120편과 문헌 등 분석
연구 후원 업체 입맛에 맞는 ‘맞춤형 지식’의 비윤리성 비판




여성 해방운동이 활발하던 1960년대 담배회사는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흡연을 ‘평등의 상징’으로 내세우며 여성을 공략한다. 사진은 이 시기 필립모리스의 ‘버지니아 슬림’ 광고 포스터. 더 이상 몰래 숨어서 남성의 담배를 피울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당신은 먼 길을 왔어요(You‘ve come a long way)’ 문구가 적혀 있다. 동아시아 제공

A형, B형, AB형, O형….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혈액형에 따라 성격이 다르다고 여긴다. 이처럼 혈액형으로 인간의 특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에서도 존재했다. 루드비크 히르슈펠트는 마케도니아 전장에서 16개국 군인 8500명의 피를 뽑아 ‘생화학적 인종계수(AB형+A형/AB형+B형)’라는 척도를 만들었다.

쉽게 말해 A형 인자를 가진 사람이 B형 인자를 가진 사람보다 더 진화했다는 것. 이 지수는 당시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있던 일본의 주요 관심사가 됐다. 일본 연구자들은 인종계수를 통해 조선인보다 일본인이 더 우월하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지난해 ‘아픔이 길이 되려면’으로 주목받은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는 “(인종계수가) 일본에 조선을 식민지로 통치할 ‘과학적’ 명분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이 책은 우리 몸을 둘러싼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고, 누가 지식을 생산하는지 등을 묻는다. 특정 연구와 지식에 담긴 관점, 연구 결과에 담긴 ‘진짜 의도’를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를 위해 논문 1120편과 문헌 300여 편을 참고했다.

지금도 수많은 연구자, 혹은 후원 업체의 입맛에 맞는 ‘맞춤형 지식들’이 양산된다. 1969년 담배회사 필립모리스는 생리학자 한스 셀리에에게 3년간 15만 달러를 주는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그는 처음으로 ‘스트레스’ 개념을 만든 인물이다. 담배가 발암 물질을 담고 있다는 연구들이 나오는 상황에서 필립모리스의 의도는 명확했다. “질병의 원인이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말해줄 객관적인 목소리가 필요했던 것. 셀리에는 법정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담배의 장점을 증언하기도 했다. 건강을 연구하는 학자가 건강을 해치는 상품을 옹호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학문을 하는 이들이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상품을 파는 회사의 돈으로 연구를 하는 것을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먼저 따져봐야 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데릭 야크 박사는 지난해 10월 ‘연기 없는 세상을 위한 재단’이라는 논문에서 담배를 끊기 힘들어하는 이에게 덜 위험한 담배를 권하는 것이 담배로 인한 사망률을 낮추는 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대안은 ‘전자담배’였다. 그는 당시 필립모리스가 만든 ‘연기 없는 세상’이라는 재단 이사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2001년 ‘담배를 권하는 가짜 과학’ 논문에서 담배회사가 과학자들을 매수했다고 비판한 인물이기도 했다.

김 교수는 지식이 담고 있는 불평등도 지적한다. 표준화된 인간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다. 적정 사무실 온도가 21도로 알려져 있는 것과 달리, 2015년 보리스 킹마 박사에 따르면 실내에서 일하는 여성이 선호하는 최적 온도는 23.2∼26.1도였다. 1960년대 몸무게 70kg, 40세 성인 남성을 표준으로 삼은 탓이다.

패트리스 트루일러 박사 연구팀은 1975년부터 1999년 사이에 미국, 유럽에서 판매가 허가된 신약 1393개를 분석했다. 중·저소득 국가에 필요한 감염성 질환 치료약이 적고 고소득 국가에 필요한 신경계, 심혈관계 질환 치료약이 많다는 결론이 나왔다. 저자의 말대로 “이윤은 어떤 약을 개발할지와 그 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지식을 생산할지를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