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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축구를 해야 공부도 잘돼” 선수 꿈꾼 의대생의 30년 후 모습은…

입력 | 2018-11-24 14:00:00


최근 월계축구회에서 활동할 때 모습. 김명천 센터장 제공.



김명천 강동경희대병원 응급의료센터장(54)은 일요일을 기다리며 한 주를 보낸다. 각종 사연이 있는 사고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들을 살리고 보살피며 쌓인 스트레스를 축구공을 차며 날려 보낸다.

“축구는 내게 떡국 같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내가 힘이 없어 보이면 떡국을 끓여 주셨다. 떡국을 먹으면 힘이 났다. 요즘 축구가 내게 그렇다. 축구공만 봐도 설레고 힘이 난다. 나를 활기차게 만드는 친구 같다고 할까….”

김 센터장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축구를 즐겼다.

“우리가 청소년 때는 ‘운동은 운동선수가, 학생은 공부’라는 공식이 성립돼 있었다. 축구를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물론 학교 선생님들까지도 ‘네가 왜 축구를 해, 공부해야지’라는 반응이었다.”

그는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짬짬이 공을 찼다.

“그 때는 공을 차지 않으면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못했다. 공을 차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운동복이 없어 교복 입고 공을 차 오후 수업이 시작되면 선생님들이 땀 냄새를 맡고 ‘때가 어느 때인데 축구를 하느냐’고 나무랐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틈만 나면 공을 찼다.”

김 센터장은 축구부가 있는 서울 숭실고 출신. 축구선수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는 경희대 의대에 합격한 뒤 그 로망을 ‘현실’로 만들었다. 의대 축구 동아리에 바로 가입해 ‘선수’로 활약을 시작한 것이다.

“사실 의대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곳이라 축구한다는 것에 대해 주변에서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조직에나 ‘이방인’ 같은 사람이 있는 법. 축구를 좋아하는 선배 및 동기가 많았다. 매 주말 공을 찼고 어떤 땐 주중에도 공을 찼다.”

대학에서 운동하기 쉽지 않았다. 특히 의대는 시험도 많았다. 하지만 공을 차지 않으면 공부가 안됐다.

“난 공부가 안 되면 공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벽에 공을 차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한 10분 벽치기를 하고 다시 공부를 했다. 그럼 공부도 잘 됐다.”

2011년 미국 뉴욕 콜롬비아 연수 때 한인축구팀에서 활약할 때 모습. 김명천 센터장 제공.



김 센터장은 체육대학의 축구선수들과도 교류했다. 그러면서 부상이 축구선수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의대를 졸업하고 전문의 생활을 하면서 팀을 만들었다.

“2000년 의사들 사이트인 메디게이트를 통해 전국의사축구팀을 만들었다. 처음엔 서울에서 모여서 축구하다 지역 축구팀을 만들어 리그전을 했다. 한 때 회원이 160명 정도까지 됐다.”

의사축구팀은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세계의사축구회가 주최하는 ‘의사축구월드컵’에 참가했다. 이후 계속 출전하고 있다.

“사무총장으로 10년을 일했는데 의사축구팀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운영돼 그만뒀다. 나는 의사들이 만나 공만 차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기본기는 물론 체력 및 밸런스 훈련도 하고 전술훈련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축구코치들까지 참여시켜 ‘축구를 제대로 배우는 기회’를 삼고 싶었지만 어느 순간 친목단체로 변질됐다.”

그는 부상으로 축구생명이 끝난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시민 구단 창단도 시도했다.

“나 같이 축구를 좋아하는 일반인도 있지만 크게 다쳐 축구생명이 끝날 위기에 있는 선수들에게도 참여 기회를 줬다. 청우라는 팀으로 하나은행이 주최하는 동호회 대회에도 나갔다. 그 대회에서 우승하면 정통 엘리트팀과 경쟁하는 FA(축구협회)컵 출전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회원들이 생업을 하면서 축구를 하는 팀이었기에 중도에 포기했다. 경기를 수요일 날 했다. 한 두 번은 참가할 수 있었지만 계속 출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봉신클럽이 유일한 순수 아마추어 팀으로 FA컵 32강에 오르며 화제를 모았던 2006년 쯤 일이었다. 김 센터장은 시민축구단까지 만들려고 펀드를 조성하기도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포기했다.

김 센터장에게 축구는 엘리트 선수들이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공을 그냥 차지 않았다. ‘프로’처럼 하고 싶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뒤 축구심판 자격증을 딴 이유다.

“축구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 1주일 휴가를 내고 연수원 들어가 이론 실기를 집중적으로 배운 뒤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 때부터 2002년 월드컵 때 한국 심판으로 유일하게 주심을 봤던 김영주 심판과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원래 지도자 자격증도 따려고 했다. 하지만 2주 넘게 시간을 비워야 해 포기했다. 병원일이 바빠 2주 이상 휴가를 낼 순 없었다.”

김 센터장의 축구 사랑은 2011년 미국 뉴욕 콜롬비아 대학으로 1년 연수를 가서도 계속 됐다.

2011년 미국 뉴욕 콜롬비아 연수 때 한인축구팀에서 활약할 때 모습. 김명천 센터장 제공.



“뉴욕으로 가기 전에 현지 축구팀을 알아봤고 뉴저지OB팀에서 뛰기로 했다. 당시 거처를 장만한 뉴저지 리치몬드에 금요일 오후 4시에 도착했는데 다음날 새벽 6시에 회원들이 픽업을 와서 공 차러 나갔다. 1년 동안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공을 찼다. 요즘도 뉴저지OB팀이 한민족축구대회에 참가하러 한국에 오면 나도 나가서 함께 찬다.”

미국 연수를 떠나기 전까진 거의 매일 공을 찼다. 하지만 병원일이 바빠지면서 요즘은 주말에만 찬다. 김 센터장은 매주 일요일 월계축구회에 나가 공을 찬다. 월계축구회는 1974년 만들어진 전통 있는 축구동호회다. 대학축구연맹 회장인 변석화 험멜코리아 회장이 만들어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2014년 한 제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일 대학축구 교류전인 덴소컵을 계기로 일본 의사들이 한국을 찾았는데 한국의사들과 축구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제자의 삼촌이 축구선수 출신 최철순 광운대 교수로 당시 대학축구연맹 간부로 있었다. 제자가 내 얘기를 했고 최 부회장이 전화를 했다. 대학시절부터 일본 오사카시립의대와 교류전을 하고 있었기에 흔쾌히 팀을 만들어 나갔다.”

당시 김 센터장의 플레이를 보고 변 회장이 월계축구회에서 공을 차라고 권유했다.

“월계축구회에는 축구선수 출신과 일반 동호인이 섞여 있었다. 수준이 아주 높았다. 축구하는 맛이 났다. 그래서 그 때부터 매주 일요일은 월계축구회에서 공을 차고 있다. 월계축구회는 공만 차지 않았다. 축구단처럼 체계적으로 운영했다. 회원들간의 우정도 두터웠다. 이렇게 좋은 팀에서 공을 차게 돼 너무 좋았다.”

왼쪽 공격수로 주로 나서는 김 센터장은 바쁜 병원일 속에서도 일요일 축구를 즐기기 위해 몸 관리를 따로 한다. 주 2,3일은 줄넘기와 웨이트트레이닝을 한다. 중증환자가 없는 자투리 시간엔 운동화를 신고 병원 주위 5km를 달린다. 사이클도 탄다.

“축구장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대충하는 것이다. 단 한 경기를 하더라도 종료 휘슬이 울릴 때 더 못 뛸 정도로 최선을 다해서 뛰어야 한다. 슬렁슬렁 뛰는 것은 보기에도 안 좋고 부상 위험도 높다. 축구하러 나와서 왔다 갔다 달리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럼 그냥 마라톤이나 하는 게 좋다. 축구장에서 축구를 해야지…. 축구의 맛을 잘 모르고 무작정 뛰면 무슨 재미냐? 패스로 상대를 무너뜨리고 상대가 멋진 플레이하면 박수를 보내고, 조기축구도 축구를 즐기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설렁설렁 차면 부상 위험도 높다. 축구를 하다보면 갑자기 안하던 동작을 할 수도 있는데 그때 다친다.”

김 센터장은 축구하면서 부상 안당하려면 한발 더 뛰어야 한다고 말한다. 체력도 있어야 한다. 전날 술 마셔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뛰어선 안 된다.

“삶의 활력소를 찾기 위해 나가 다치면 얼마나 억울한가. 일요일을 위해 몸을 잘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축구를 마친 뒤 술 마시는 문화도 자제해야 한다. 월요일부터 다시 활기차게 생활해야 하는데 축구를 하고 피곤이 떠 쌓이면 무의미한 활동이 되고 만다. 몸이 회복할 시간을 줘야 한다. 피곤한데 일의 능률이 오를 수 있을까. 축구가 삶에 선순환이 돼야 하는데 악순환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2011년 미국 뉴욕 콜롬비아 연수 때 한인축구팀에서 활약할 때 모습. 김명천 센터장 제공.



김 센터장은 조기축구회에 만연한 잘못된 운동문화도 부상을 키운다고 한다. 그는 축구하다 심정지로 쓰러진 사람을 심폐소생술로 살린 적도 있다.

“축구장에 나가서 바로 공을 차는 사람들이 많다. 부상의 지름길이다. 최소 10~15분 워밍업을 해야 한다. 우리 몸은 무조건 섭씨 1도를 높여야 근육 부드러워지며 체내 효소도 활성화돼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다. 그냥 바로 차면 근육이 경직돼 부상으로 이어진다. 축구하러 나가 불상사를 당하면 가족들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또 하나 마스터스 스포츠에서 불굴의 정신은 중요하지 않다. 몸에 이상이 있으면 바로 중단하는 것이 평생스포츠를 즐기는 정신이다.”

축구장에서 배우는 게 많단다.

“축구는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내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 느끼고 내 능력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슈팅과 드리블, 패스…. 못하면 노력하고 잘하면 겸손하고…. 축구를 통해 성숙해진다. 축구장에서 공을 차다보면 사람들 성격이 다 나온다. 협력 봉사하고 뒷마무리까지 잘 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밖에 모르는 플레이를 하는 사람도 있다. 축구는 단체 운동이다. 팀을 위해서 뛰는 게 기본이다. 이런 측면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축구와 농구, 배구 등 구기 종목을 꼭 시켜야 한다. 조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협력하고 봉사하는 정신을 배울 수 있다.”

속칭 조기축구로 불리는 동호회 축구의 잘못된 문화에 안타까움도 있다.

“2002년 이후 축구동회회가 부쩍 늘었는데 경기할 때 술 마시고 싸우는 잘못된 문화가 형성돼 있다. 팀마다 순회코치를 두고 심판도 제대로 보고 규칙을 잘 지키는 문화가 절실하다. 이제 생활체육 축구와 합친 대한축구협회가 나서야 한다. 아이들도 아빠 따라 나가 축구를 배워야 하는데 늘 싸우는 모습만 보이고 있다. 누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겠느냐.”

월계축구회에서 회원들과 어울리는 모습.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명천 센터장. 월계축구회 제공.


김 센터장에게 축구는 평생 반려스포츠다.

“난 내 축구실력의 최고점을 70세에 맞춰 놨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70세 될 때 가장 좋은 실력을 발휘하겠다는 목표다. 무리하지 않고 항상 체력을 관리하면서 평생 즐기고 싶다는 얘기다.”

김 센터장은 축구 없는 삶은 생각해보지 않았다.

“일요일에 축구를 하면 환자 보는 일도 즐겁다. 활력이랄까. 힘이 생긴다. 사람들이 내가 늘 웃는다고 한다. 축구의 힘이다. 솔직히 응급센터에서는 상상도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최선을 다하지만 죽고 사는 것은 내가 어떻게 못한다. 환자들이 죽으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해보지 못한 일에 대한 회한’이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오늘을 투자해야 한다. 난 축구할 때 가장 행복하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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