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논설위원
한데 태영호 주장의 핵심은 다른 데 있다. 그는 북한의 ‘센 농담’보다 진짜 ‘오만무례’를 문제 삼아야 한다고 했다. 평양 정상회담 때 공항 행사장에 인공기만 높이 띄우고 두 정상의 기념촬영 때 한반도 지도 위에 노동당 마크가 있는 배경을 사용한 것에 공식 사죄를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적화통일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런 행위야말로 “북남 관계를 통일로 가는 특수관계라고 합의한 기본합의서의 난폭한 유린”이라고 했다.
고위 외교관 출신 탈북자에게서 나온 ‘남북 특수관계’ 발언은 요즘 우리 정부의 사용법과는 사뭇 달랐다. 통일부가 탈북민 출신 기자를 회담 현장 취재에서 배제하면서, 북한의 몰상식과 결례를 매번 변호하면서, 그리고 청와대가 공동선언문의 국회 패싱을 놓고 무모한 법리(法理)까지 동원해 해명하면서 거론하던 그런 쓰임새는 아니었다.
이런 특수관계에 국가 간 관행을 적용해 보려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1년 9·11테러 직후 금강산에서 열린 장관급회담의 수석대표는 홍순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다. 평생 외교관으로 잔뼈가 굵은 홍순영은 남북회담도 ‘국제기준’에 따라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협상에 임했고, 북한의 회담 자세에 넌더리를 내며 결렬을 선언하고 돌아왔다. ‘인내심을 갖고 합의문을 만들라’는 게 서울의 훈령이었지만 그는 수석대표의 재량권을 내세웠다.
결과는 무참한 실패였다. 야당에선 박수를 받았지만, 그는 취임한 지 불과 4개월여 만에 경질되면서 1998년 통일부가 부(部) 체제로 개편된 이래 최단명 장관으로 기록됐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관계를 주도한 임동원 당시 대통령특보의 회고에선 날 선 분기마저 읽힌다.
“어렵게 성사시킨 회담을 우리가 파탄시켰으니 대통령의 상심과 분노가 클 수밖에 없었다. 통일·안보 문제는 대통령이 직접 관장해야 할 국가 중대사이며 다른 누군가가 마음대로 결정할 분야가 아니었다. 이 사건을 통해 통일 문제를 담당하는 장관이 수석대표로 협상하는 경우에도 반드시 협상자로서 상부 훈령에 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새삼 되새기게 했다.”
이 사건이 이후 남북회담에 던진 학습효과는 컸다. 똑 부러지고 강단 있는 태도는 그 누구든 회담 대표에게 권장할 미덕이 결코 아니게 됐다. 어떻게든 회담을 깨뜨리지 않고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숙명처럼 됐다. 지금 대통령의 주문도 예나 다를 게 없다. “유리그릇 다루듯 하라.”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