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보행자연맹(IFP) 크리스티안 토마스 박사가 스위스 교통 안전 정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취리히=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 인구 40만 취리히, 교통사고 사망자는 ‘0명’
취리히는 전 세계에서 가장 걷기 좋은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인구가 40만 명이지만 지난해 교통사고 사망자는 0명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보행자 중심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진화 중이다. 국제보행자연맹(IFP) 전 사무총장이자 스위스 총책임인 크리스티안 토마스 박사와 6시간동안 취리히 도심을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광고 로드중
토마스 박사는 길을 나서기 전 ‘섬세함’를 강조했다. 2015년 보행안전 국제세미나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기도 했던 그는 “서울은 매우 큰 도시인만큼 차량이 많고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도로로 나온 자동차는 보행자에게 잠재적 위험 요인이 된다. 자동차가 속도를 내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고 차량 이용이 줄도록 대중교통 체계를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의 말처럼 취리히 교통안전의 가장 큰 목표는 자동차 이용이 불편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취리히는 도심 도로의 제한최고속도가 시속 30~50㎞다. 국내에서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도입 중인 ‘안전속도 5030’을 교과서처럼 지키고 있는 셈이다.
취리히 20존 바닥 표시. 취리히=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스위스 취리히 곳곳에 있는 ‘20존’ 표지판. 어린이가 도로로 뛰어드는 모습을 표현해 운전자 주의를 요하고 있다. 취리히=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과속 처분도 엄격하다. 어린이 보호구역(스쿨존)에서 과속 사실이 적발되면 경우에 따라 면허를 바로 박탈한다. 이날 찾은 스쿨존 5개 앞에는 모두 과속단속 카메라가 있었다. 운전자는 운전면허를 취득하더라도 1년 간 ‘교육 면허(learner license)’를 발급받아 운전하면서과속 등 법규를 위반하지 않아야 정식 면허를 받을 수 있다.
대신 대중교통이 자가용 이용보다 훨씬 편하도록 교통체계를 정비했다. 기차와 노면전차(트램), 버스 간 환승에 걸리는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배차간격을 정확히 맞췄다. 토마스 박사는 “취리히역 44번 게이트에 내려서 역 앞 트램 정류장까지 성인 걸음으로 7분이 걸린다. 보행자가 급하게 서두르거나 기다리지 않아도 되도록 배차 간격을 정확히 관리한다”고 말했다.
보행자 통행이 잦은 지역은 신호 간격을 좁혀 운전자를 불편하게 한다. 취리히역 앞 횡단보도는 1차로 도로인데도 보행자 신호등이 있다. 이 신호등은 30초마다 초록불로 바뀐다. 신호 한 번마다 자동차가 대여섯 대 밖에 지나갈 수 없다. 토마스 박사는 “자동차가 보행자를 헤집고 운전해야 하는 구조라 어떤 운전자도 역 앞을 지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 도로와 보도의 높낮이 차는 보행자 편의를 위해 3㎝ 이상 차이가 나지 않도록 법에 명시됐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가장 붐비는 벨뷰역 인근. 트램과 버스, 자동차와 보행자가 모두 이용하는 도로지만 지난해 사망 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보행자들이 도로를 자유롭게 가로지르고 있다. 취리히=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 왕복 2차로에도 보행섬 설치
광고 로드중
취리히 시내를 6시간 걷는 동안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는 한 대도 발견하지 못했다. 보행자가 길을 건널 때는 멀리서부터 속도를 줄였고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보행섬에 멈춰 있으면 오히려 지나가라고 손짓했다. 토마스 박사는 “취리히는 여전히 어디에 보행섬이 필요한지, 보행자가 자동차를 신경 쓰며 걷지는 않는지 체크하며 진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했다.
▼ “바퀴가 멈췄는지 보세요” 스위스 유치원 교통교육 실습현장 동행 ▼
스위스 취리히의 한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이 횡단보도 건너는 법을 배우고 있다. 취리히=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지난달 23일(현지 시간) 스위스 취리히 리마것 유치원 4세 반에 제복을 입은 경찰관 크리스티안 셜리바움 씨가 나타났다. 1년에 2번 있는 교통안전교육 위해 경찰관이 직접 방문한 것이다. 어린이 20명이 눈을 떼지 못하고 셜리바움 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셜리바움 씨가 동그랗게 둘러앉은 아이들 사이에 노란색 판을 3개 깔아서 횡단보도를 만들자 아이들 눈이 반짝였다. 교통안전교육을 처음 받는 4세 반은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방법을 배운다. 교실에서 연습한 뒤엔 경찰관이 보는 앞에서 유치원 앞 횡단보도를 혼자 건너는 실습시간을 갖는다.
스위스 횡단보도는 눈이 왔을 때도 잘 식별 되도록 노란색을 사용하고 있다. 취리히=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광고 로드중
교통안전교육을 받고있는 4세 어린이가 경찰관이 보는 앞에서 혼자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취리히=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아이뿐 아니라 부모도 교통안전교육 내용을 꾸준히 전달 받는다. 아이들을 위한 교재 뒷장에는 부모들을 위한 교통안전교육 방법이 소개돼 있다. 발달과정별로 3세에는 인도를 걷는 법, 4세에는 도로와 횡단보도를 구분하는 법, 6세에는 주차된 차 사이에서 나와 길을 건너는 법 등을 가르치라고 권고한다. 또 유치원생은 등·하원 시 주황색 형광 반사 조끼를 입게 하고, 초등 저학년은 노란색 형광 모자를 씌우라고 안내받는다.
크리스티안 토마스 국제보행자연맹(IFP) 박사는 “부모들이 자기가 배운 교통안전교육 내용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면서 가정교육이 확실히 되는 선순환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취리히=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