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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현의 바다와 배, 그리고 별]〈3〉흑산도에는 여성 선장이 있다

입력 | 2018-11-02 03:00:00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전직 선장

손예진은 ‘컬크러시’ 그 자체였다.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서 얼마나 멋진가. 뱃멀미나 하는 사내들을 휘어잡는 여두목으로 배를 호령하는 당당함이란. 이런 여성이라면 거친 바다에서 의지할 만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배와 여성’은 그동안 상극이었다. ‘배에 여성이 타면 안 된다’는 금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들었다. 1978년 해양대에 입학했을 때 동기생 400명 중 여학생은 1명도 없었다. ‘여학생은 입학 불가’였다. 거친 바다와 여성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금녀의 벽은 1990년대 말부터 깨졌다. 하지만 정원의 5%만 여학생의 입학이 허용됐다.

미국에서도 여선장이 나온 것은 얼마 안 됐다. 2004년 미국 뉴욕 방문 때 ‘킹스포인트’를 찾았다. 킹스포인트는 미국 상선사관학교의 별칭이다. 한국의 해양대가 벤치마킹한 대학이다. 이 대학의 해상법 전공 교수를 만났는데 40대 중반 여성이었다. 명함을 주고받는데 내 명함에 ‘선장’이라고 적힌 것을 보고는 “나도 선장 출신”이라고 했다. 그는 텍사스해양대를 졸업하고 상선에서 근무했으며, 미국 상선 첫 여선장이며 첫 여성 도선사였다. 당시 한국에는 여성 항해사도 드물었다.

어선의 경우 이런 터부가 강하지 않다. 부부가 같이 어선을 타고 고기 잡는 모습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남편은 선장, 부인은 부선장인 셈이다. 정부는 어선의 사고 예방을 위해 면허제를 도입하려고 했다. 어선 등 소형선박 선원에게 소형선박조종사 면허를 부여해 관리하자는 취지다. 면접시험에 면접관으로 갔는데, 내 앞에 중년 여성이 나타났다. 남편과 함께 고기잡이배를 모는데, 자신이 선장 역할을 한다고 했다. 합격을 시켜줄 정도는 됐다. 그는 나에게 “흑산도에 한번 놀러 오시면 잘 대접하겠다”라고 했다. 면접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적어도 흑산도 어선에는 여선장이 있는 셈이다.

묘하게도 바다에서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때가 있다. 선박 진수식의 테이프 커팅은 반드시 여성의 몫이다. 첫 항해도 처녀항해(maiden voyage)라고 부른다. 선박은 영어에서 ‘쉬(she)’라고 부른다.

1982년 내가 직업적으로 처음 탄 배 이름은 ‘페넬로페 오브 요크(Penelope of York)’였다. 그리스신화 속 등장인물 페넬로페에서 딴 이름이었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아내다. 사우디아라비아 홍해의 얀부에서 페르시아만의 라스타누라를 왕복하며 원유를 나르는 배였다. 계약 기간 1년 동안 매주 두 번씩 입출항을 해야 하는 고된 일이었다. 더 힘든 점은 입항해도 좋아하는 맥주를 마실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생하는데도 스트레스를 풀 수 없다니…. 그래서 나와 다른 선원들은 이 배의 이름을 살짝 바꿔 ‘피보고 욕보는 배’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해양대에 여성의 입학이 허용된 지 20년. 드디어 지난해 국내서도 외항 상선에 여성 선장이 탄생했다.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듯이 금녀의 벽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여성의 섬세한 감각이 바닷길을 환히 비춰 주길 기대한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전직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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