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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철희]남북관계, 임종석이 나설 일 아니다

입력 | 2018-09-14 03:00:00


이철희 논설위원

뜬금없었다. “특사단이 다시 평양에 갑니다. 우리 스스로 새로운 조건과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는 간절함을 안고….”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이 3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어쩌다 한 번쯤 띄우던 가벼운 단상이나 소회가 아니었다. 그가 ‘판문점선언이행추진위원장’도 맡고 있다고는 하지만 뭔가 거슬렸다.

임 실장이 글을 올린 것은 특사단 방북을 이틀 앞두고 특사 명단을 발표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이 평양에 가지 못하는 데 대한 아쉬움으로 읽혔다. 수석특사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대신 그를 보내는 방안이 떠오르고 있다는 얘기가 나왔던 터다. 그는 2월 김여정의 서울 방문 때 환송만찬을 주재했고 4·27 판문점 회담 때도 김여정의 카운터파트였다. 그로선 의욕을 보일 법도 하다.

그리고 여드레 뒤인 11일, 난데없었다. 그는 페이스북에 대통령의 평양 동행 요청을 거절한 국회의장단과 야당 대표들을 향해 ‘올드보이가 아닌 꽃할배의 면모를 보여 달라’고 썼다. 호소라지만 그렇게 읽히지 않았다. 격한 실망감이 묻어났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급증도 드러냈다.

그는 “저도 일찍 제도권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며 ‘중진들의 힘’을 강조했다. 사실 초선 국회의원 시절 그는 선배 중진 의원이 밤늦은 술자리에 호출하면 금세 달려오는 붙임성 좋은 소장파였다. 그렇게 재선 의원에 서울시 부시장을 거친 현실 정치인이 됐지만, 이번에 그의 의욕은 앞섰고 일처리는 서툴렀다. 30년 전 그의 모습마저 어른거리게 만들었다.

임종석 전대협 의장이 집회에 등장하면 학생 수천, 수만 명이 일제히 기립해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을 외치며 전대협 진군가를 불렀다. 대중스타 못지않은 인기였다. 경찰 포위망이 좁혀지면 학생 수백 명이 그를 에워싸 전경과 공방을 벌였고, ‘가짜 임종석’ 수십 명이 “내가 임종석이다” 외치며 그의 탈출을 도왔다.(박찬수 ‘NL 현대사’)

당시 그의 이름은 북한에서도 회자됐다고 탈북자들은 전한다. 전대협의 평양축전 파견자 임수경 못지않게 ‘파쑈도당과 싸우는 신출귀몰 임길동’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그러니 이번에 자신이 전면에 나서 역할을 한다면 북한을 설득해 꼬인 한반도 정세를 푸는 데 한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겼을지도, 또 주변에서 그렇게 권유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게 맞을까. 가뜩이나 쌍심지를 켜고 청와대를 바라보는 보수 야당과 일부 국민의 눈초리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일까.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민주국가에서 모든 대외정책의 종착지는 국내 정치다. 아무리 훌륭한 국가 간 합의를 이뤄도 국민과 의회를 설득하지 못하면 모든 게 없던 일이 되고 만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한 미국 두 전직 대통령의 경험은 그 성패를 여실히 보여준다. 대학총장 출신의 이상주의자 우드로 윌슨은 파리평화회의에서 국제연맹 창설을 관철시켰지만 상원을 장악한 고립주의 야당의 반대를 끝내 넘어서지 못했다. 반면 뼛속까지 정치인이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윌슨의 실패에서 철저히 배웠고 얄타회담 참석에 앞서 유력 야당 의원과 비공식적 동맹도 맺었다. 그의 사후에도 집단안보체제 유엔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다.

지금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아래선 북-미 협상이 타결되더라도 과연 의회 관문을 넘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온통 중간선거에만 신경이 곤두선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의 협상보다는 당장의 상황 관리에만 치중할 가능성도 높다. 그러면 내주 평양에서 나올 성과도 비핵화를 빼곤 대부분 잠정적 합의에 그친다. 지레 의욕을 앞세워 논란을 일으킬 이유도 없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