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호놀룰루 미술관의 ‘레인 컬렉션’에서 발견한 조선 초기 회화 ‘계회도’ 앞에 선 정우택 동국대 박물관장. 그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 우리 문화재들이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잠자고 있다”며 “해외의 한국학 전문가들을 육성해 현지에서 한국의 국보·보물급 문화유산을 발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국 문화재 권위자인 이들이 향한 곳은 바로 미술관의 ‘레인 컬렉션’ 수장고다. 한국 언론에 처음으로 공개한 이 수장고는 대규모 동아시아 고미술품이 가득한 곳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한국과 일본, 중국 등을 아우르는 각종 유물 2963점이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길 기다리고 있다.
수장고에 들어간 학자들은 각종 고서화 데이터베이스(DB)가 수록된 테블릿PC 등을 꺼낸 뒤 바로 조사를 시작했다. 2014년부터 해마다 2차례씩 진행돼 올해로 8번째를 맞은 ‘레인 컬렉션’ 감정 현장이다.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하와이에서 한국의 문화유산을 찾고 있는 이들의 연구를 단독으로 동행 취재했다.
“조선시대 전북 임실군 등지에서 유행한 낙화(烙畵) 작품이군. 화찬(畵讚)에 남원이라고 명시돼 있는 등 한국의 작품이 확실하네.”(정 교수)
두 학자는 불에 달군 인두로 표면을 지져 그림을 완성한 한 작품을 두고, 열띤 감정을 펼쳤다. 이들이 보고 있던 회화는 19세기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낙화였다. 먹이를 노려보는 매를 표현한 그림으로, 조선시대 전북 일대에서 유행한 독특한 전통 예술이다. 정 교수는 “꼬박 100여 점의 작품을 감정한 뒤에야 겨우 1건의 한국 회화를 발견했다”며 “작품성이 뛰어나진 않지만 한국 전통의 낙화를 하와이에서 발견한 것만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고미술인지라, 한 작품마다 감정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기도 한다. 작가를 확인할 수 있는 화찬과 인장을 검증해 구체적인 작품의 창작 시기를 밝혀내느 게 관건. 이후 작품성 및 보존 상태 등을 평가해 그림 제목을 붙이고, 최종 등급을 매긴다. 하루 종일 감정해도 최대 20~30여 점에 불과하다.
호놀룰루 미술관 ‘레인 컬렉션’의 조선 회화인 계회도
“당시 조선 초기 문관인 윤안성(1542~1615)의 시가 적혀진 1586년 그림 ‘계회도(契會圖)를 발견했죠. 조선 초기 산수화의 전형으로 평가받을 만큼 뛰어난 작품이었습니다. 그 때 결심했죠. 하와이에서 잠자고 있는 한국의 문화유산을 꼭 찾아내야겠다고 말입니다.”
●1%의 가능성을 향한 도전
물론 레인 컬렉션의 대부분은 성격상 일본 미술품이 다수이다. 지난달 27~30일 회화 총 130점을 감정했는데, 한국 전통 회화는 단 2점밖에 찾지 못했다. 지금까지 조사가 완료된 1100여 점 가운데 한국 작품은 30여 점에 그쳤다. 하지만 정 교수는 사비를 들여 조사 작업을 지금까지 이어왔다. 이 무모한 도전을 정 교수는 왜 계속 하는 걸까. 그는 “1%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호놀룰루 미술관 ‘레인 컬렉션’의 조선 회화인 주돈이 애련도
1927년부터 한국미술 상설전시실을 운영할 만큼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은 호놀룰루미술관은 정 교수의 활동을 계기로 한국과 전시 교류를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동국대 박물관에서 열린 ’나한-깨달음에 이른 수행자‘ 특별전에 호놀룰루 미술관에서 소장한 조선 전기의 ’석가설법도‘를 대여해주기도 했다. 숀 아이크만 아시아부 큐레이터는 “우리 미술관의 대표적 유물이지만 레인 컬렉션 조사 활동에서 보여준 정 교수팀의 열정을 믿고 아무 조건 없이 대여해줬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이 같은 활동이 개인 차원에서 머물러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세계 곳곳에 숨겨진 한국의 문화유산을 찾기 위해 해외 현지에 더 많은 한국학 전문가들을 육성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미 알려져 있는 문화재들은 사실상 환수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나라의 각종 국보 보물급 문화유산이 세계 어디에서 잠자고 있는지 알 수 없어요. 이들을 밝혀내기 위해선 해외에 상주하면서 한국 문화재를 알아볼 수 있는 전문가들이 필요합니다. 레인 컬렉션 조사와 같은 도전이 계속해서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호놀룰루=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