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지/진경환 지음/396쪽·2만3000원·소소의책 ◇조선 무인의 역사, 1600∼1894년/유진 Y. 박 지음·유현재 옮김/292쪽·2만 원·푸른역사 ◇법과 풍속으로 본 조선 여성의 삶/장병인 지음/400쪽·2만2000원·휴머니스트
유득공의 ‘경도잡지’는 붓은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것이 최고라고 했다. 이 밖에 설화지(雪花紙·눈처럼 희고 꽃처럼 아름다운 종이), 황해도 해주의 유매먹(油煤墨·기름을 태운 그을음으로 만든 먹)도 최고로 꼽혔다. 사진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문방도(文房圖) 병풍. 소소의책 제공
책에 담긴 양반들의 ‘취향’은 놀라운 수준이다. 비둘기를 오늘날의 마니아처럼 극진히 사랑한 양반들도 있었다. 재력이 있는 서울 양반들은 8칸짜리 비둘기 집인 용대장(龍隊藏)을 호화롭게 장식하고 칸마다 다른 종류의 진귀한 비둘기를 키웠다. 누가 더 비싼 비둘기를 많이 사들이냐를 놓고 경쟁하기도 했다. ‘경도잡지’는 8가지 비둘기 종류를 소개하고 있다.
양반들의 매화나 국화 사랑도 정평이 나 있다. 18세기 화훼 재배가 성행했고, 관련 서적도 쏟아져 나왔다. 화초를 잘 기른다는 말을 들으려면 소철(蘇鐵) 정도는 능숙하게 관리할 줄 알아야 했다. 소철은 주로 중국 동남부, 일본 남부 등 더운 곳에서 자라는 나무로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키우기 쉽지 않았다. 양반들은 온실을 만들어서 이런 식물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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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무인의 역사…’는 조선에서 문과(文科)에 비해 덜 조명된 무과(武科)에 대한 연구를 풀어쓴 책이다. 한국사를 연구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가 2007년 미국에서 출간했다.
책에 따르면 무과는 평민들의 신분 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면이 강하다. 16세기부터는 서얼과 천민 출신도 곡물로 값을 치르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1676년 무과에서 선발된 1만7000여 명의 합격자 가운데 양반 출신은 한 명도 없었다.
무과 급제자 수도 엄청났다. 1402∼1591년 동안 무과 급제자는 7758명이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15년(1592∼1607년) 동안 약 2만∼4만 명이 무과에 합격했다. 이후 무과가 폐지되는 1894년까지 급제자는 12만1623명이나 됐다. 이들이 모두 무관으로 임용된 건 아니다. 저자는 “조선은 피지배층에 잠재된 체제 전복적 요소가 봉기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로 무과를 활용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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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