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은 헝가리 청년 가보 세보 씨
‘한국을 알고 싶고 한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 시작은 그 흔한 K-Pop도 드라마도 아니었다. 헝가리 청년 가보 세보 씨(36)를 부다페스트에서 움직인 건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 김기덕 감독의 장르영화들이었다.
한국영화 이론을 공부하겠다며 2015년 9월 고려대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 지 1년, 가보 씨는 또 한 번의 전기를 맞았다. 고 신상옥 감독(1926~2006)과 영화배우 최은희(1926~2018) 부부의 납북과 탈북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를 관람한 뒤 북한 영화로 고개를 돌린 것. 논문 ‘신상옥 감독이 북한 영화에 미친 영향’으로 이달 초 박사학위를 받은 가보 씨를 10일 고려대에서 만났다.
“신 감독이 가져온 변화요? 사회 문제에 천착하던 북한 영화를 사랑과 같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감정을 조명할 수 있도록 만들었죠.”
그는 이전 영화들의 장면들을 비교하며 “남녀가 멀찌감치 떨어져 있거나 동지적 감정으로 손을 잡는 게 전부였던 북한 영화가 확 달라졌다. 연애감정을 살리거나 피가 낭자한 자극적인 장면들이 포함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신 감독 납북 전 옛날 북한영화 ‘춘향전’ 속 성춘향과 이몽룡의 첫날밤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장면이었다”고도 귀띔했다.
괴물이 나오는 판타지 SF영화 ‘불가사리’가 가져온 음향효과 등 기술 변화도 상당했다. ‘연인과 독재자’ 시사회에서 우연히 만난 신 감독 아들 신정균 감독과의 심층 인터뷰는 천군만마였다. 신 감독 부부가 한국으로 귀국한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과 같은 해빙 무드를 타고 불가사리가 한국에서 재개봉 됐을 때 “아버지(신상옥 감독)가 불같이 화를 내셨다. 북한에서 만든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는 흥미로운 일화도 들을 수 있었다.
가보 씨가 북한 영화에 애착을 가질 수 있었던 데는 소련 아래서 공산주의를 겪은 고국 헝가리와의 유사점도 배경이 됐다. 그는 공산주의 시절인 1950년대 헝가리 영화와 북한의 1980년대 영화를 비교하기도 했다. “주인공들의 직업이 몸을 쓰는 노동자로서 땀 흘려 일해 공화국에 기여한다는 점이 공통점이라면 헝가리 영화는 내부반동 인물을 교화해 올바른 체제인사로 교화시켜나가는 것이 다르다. 이에 비해 북한은 미국이나 일본 등 외부의 적을 만들어 물리치고 민족주의를 고취시켜 나간다”고 짚었다.
박사과정을 마친 뒤 헝가리로 돌아가는 가보 씨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북한에 대한 영화를 꼭 만들고 싶다. 유럽에서는 아직 베일에 가려진 북한을 알리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