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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사명? 신나고 재미있어 소설 쓴다”

입력 | 2018-03-29 03:00:00

[21세기 청년 작가들]<4> 새 트렌드 이끄는 손보미




마감이 있으면 계획했던 여행도 미루게 된다. 생활 전체가 글쓰기에 붙들려 있지만 쓰기의 즐거움이 크다는 손보미 씨는 “내가 기쁘듯 독자들도 이야기를 즐겁게, 재미있게 느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이게 안 되면 소설가로서 자질이 없는 거다.”

가장 아끼던 소설을 투고할 때 손보미 씨(38)는 이렇게 생각했다. 문예지 신인상을 수상했지만 청탁이 없어 소설을 계속 써야 할지 고민하던 터였다. 단편 ‘담요’가 2011년 새해 첫날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게 된 계기였다. 그는 그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였고 독보적인 주목을 받은 신인이었다.

지난해 ‘젊어진’ 대산문학상의 소설 부문 수상자가 그이다. 처음 쓴 장편 ‘디어 랄프 로렌’으로 중장년 수상자들이 다수였던 이 상의 주인공이 됐다. 길을 걸으면서 무심히 전화를 받았다가 선정 소식을 듣고는 멈춰 선 채 “정말요?”라고 물었다고, “제가 받을 수 있는 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작가는 시상식을 마치고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겸손한 모습이었다.

“평범하게 공부하고, 평범하고 놀았고, 점수 맞춰 국문과에 진학하고….”

소설가란 삶의 경험이 많아야 할 것 같은 특별한 직업이어서 꿈꾸지 않았다지만, 그가 쓴 습작을 본 대학 선배는 타고난 재능이 있음을 단번에 알았다. 훗날 그의 남편이 되는 소설가 김종옥 씨의 격려와 함께 그는 작가의 꿈을 키워 나갔다.

“소설 쓰는 건 열의를 갖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른 건 그만큼 재미있는 게 없었다.”

소설 쓰기의 즐거움은 손 씨가 보기에 21세기 작가들이 20세기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작품을 쓰는 일이 예술을 하는 것이고 사회적 책무를 담당하는 일이라고 여겼던 지난 세기와 달리 요즘 작가들에게는 작품 쓰기가 작가 개인에게 기쁨을 주느냐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앞선 시대에도, 지금도 작가들은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다만 젊은 작가들은 그 노력의 동기를 외적인 거대담론이 아니라 내적인 희열에서 찾으려는 게 전 시대보다 훨씬 클 것”이라고 손 씨는 말했다. “이전과 달리 지금은 창작하기 말고도 자신만의 밥벌이가 필요한 시대”라고 얘기할 때는 저성장 시대 청년들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한국 소설이 ‘랄프 로렌’이라는 패션브랜드를 제목과 소재로 내세운 것도 이례적이거니와 실존 인물인 랄프 로렌의 삶이 ‘그럴듯한’ 허구로 그려진 이 소설은, 등단 10년도 안 된 작가가 ‘손보미류 소설’이라는 트렌드를 만들어낸 동력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한다. 그는 실제는 아니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를 무심한 듯, 그러면서도 섬세하게 들려주면서 깊은 여운을 전달한다. 소설에 오래 머물러 있도록 하는 여운은, 손 씨가 생각하는 이 시대 문학의 의미이기도 하다.

“영화, 드라마 같은 영상으로 된 서사와 달리 문장으로 만들어진 서사인 소설은 다 읽고 났을 때 그 서사 속에 머물게 하는 힘이 강한 것 같다. 책을 덮은 뒤에도 인물에 대해, 행간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 보게 한다.”

빨리 결정하고 빨리 움직이는 것이 옳은 때인 듯하지만 실은 한 인간이 어떤 판단을 내리기까지 무수히 많은 배경이 있다는 것, 소설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뒷얘기들을 들여다보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들여서 뭔가를 한다는 게 현대사회에서는 단점으로 부각될 수 있다는 게 쓸쓸하지만…”이라고 아쉬움을 내비치면서도 그는 “소설을 통해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한다. 읽는 사람도 그러리라고 믿는다”며 눈을 빛냈다. 그런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의 기쁨이 짐작되는 표정이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