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요.”
“네???”
나는 네 아이의 예비 엄마다. 아이 넷 워킹맘이라니 식겁할지 모르겠다. 나 스스로도 뜨악한데 남들은 오죽하랴. 직장 다니며 하나둘 가진 대로 낳다 보니 어느 새 다자녀 엄마가 돼있었다. 그래도 넷까지 낳을 생각은 없었는데 얼마 전 계획에 없이 덜컥 넷째까지 생겨버렸다. 난임 인구 20만 명인 시대에 이렇게 임신이 잘 되는 것도 복이지만 앞으로 키울 생각을 하면 막막하다.
본래 ‘자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다자녀 예찬론자였다. 하지만 셋째를 낳고 복직한 뒤 생각이 바뀌었다. 스스로도 힘들었지만 특히 일과가 불규칙한 기자라는 직업 특성상 1주일에 한두 번은 남의 손 빌리는 ‘죄인’이 되는 게 괴로웠다. 아이가 한둘이면 모를까 셋은 외할머니인 친정 엄마에게도 버거운 일이었다. 야근 도중 종종 친정 엄마의 전화번호가 뜨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뛰지 말라는 데 말을 안 듣는다,’ ‘목욕을 안 하려 한다,’ ‘좀체 자질 않는다’ 등 아이들에게 직접 호통을 쳐달라는 SOS였다.
아이가 많다보니 사건 사고도 많다. 지난해 12월 올림픽을 앞두고 평창 출장을 갔을 때다. 도착한 지 몇 시간이 채 안 돼 막내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열나더니 토 한다’며 전화가 왔다. 난감했다. 하필 친정 엄마가 여행을 가신 날이었다. 여동생은 직장에 다니고 남편과 시댁은 지방이었다(우린 주말 부부다). 아이들 하원 뒤 봐주시는 아이 돌보미가 오시려면 멀었다. 하다 못해 아이 친구 엄마까지 떠올려봤지만 똑같이 영·유아 키우는 집에 아픈 아이를 맡기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아직 일을 하시는 친정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죽으란 법은 없는지 일정을 취소하고 애들을 봐주시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지금껏 직장에 다니시는 만큼 손주들을 온전히 보신 적 없는 아빠였다. 종일 ‘불편한 동거’였겠지만 내 입장에선 그래도 그렇게나마 하루를 때울 수 있어 다행이었다.
‘혼자 못 뛰어놀았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는데 그날 집에 돌아가 첫째에게 물으니 태연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선생님이 아침에 어린이집에 있는 운동화 신겨주시던 걸?” 아, 이래서 학기 초 아예 운동화 한 켤레를 보내달라고 했나… 어린이집도 워킹맘에 적응해 가는가 보다.
세 아이 때도 이렇게 간신히 버텼는데 네 아이라니. 어느 순간에는 기자, 어느 순간에는 엄마로, 매일 ‘정신분열’ 중이라는 누구 말처럼 남은 내 정신이 하나 더 쪼개질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지금도 엄마, 기자 그 어느 하나 완벽하게 못 하고 있는데.
진료실로 들어가자 의사는 바로 배 초음파를 보자고 했다. 엄마의 걱정이 무색하게 아기는 꼼지락꼼지락 잘 놀고 있었다. 자궁 경부에도 이상이 없었다. 곳곳을 살피고 내게 하혈 색 등을 물어본 의사는 “워낙 경산이라 태반이 조금 떨어져 나온 것”이라고 했다. 출산만 네 번째다 보니 자궁벽에서 태반이 쉽게 떨어져 나가고 그게 생리처럼 나온다는 이야기였다. 앞으로도 좀 더 나올 수 있으니 놀라지 말라며 회사를 다녀도 되고 누워있거나 쉴 필요도 없다고 덧붙였다. 몸에 긴장이 탁 풀렸다.
걱정하실 분들을 위해 재차 확인을 해두면 현재 아기는 매우 건강하다. 내 몸에도 아무 이상이 없고 이어진 검진도 모두 무사통과했다. 한 차례 푸닥거리를 한 뒤 오히려 답답함이 가시고 마음은 편해졌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네 아이 엄마 기자’ 누구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선구자(?)가 돼보자는 생각도 생겼다.
앞으로 힘든 일, 즐거운 일, ‘+1’이 된 다자녀 육아를 하며 느끼는 일들이 많을 것이다. 소소하지만 매일 전쟁 같은 일상을 이곳에 나누어보고자 한다. 선구자는 오만을 떨어본 농담이고, 그저 누군가에게 공감이 되고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다. 사실 필자 스스로에게도 치유의 시간이 될 거라 생각한다. 네 아이 엄마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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