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서울]<3> 60년 토박이 오정옥씨의 후암동
서울 용산구 후암동 60년 토박이 오정옥 씨가 남산에 올라 동네를 가리키며 웃고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오 씨가 다닌 후암초등학교를 내년이면 손자가 입학한다. 아버지 손을 잡고 자주 올랐던 남산을 지금은 손자의 손을 잡고 오른다. 오 씨 아버지는 “이곳이 고향이다”란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오 씨는 “피란민들이 만든 이 동네를 아버지는 무척 사랑하셨다. 임종도 집에서 했다. 내가 후암동을 떠날 수 없는 이유다”라고 말했다.
○ 피란민의 동네 후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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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동 삼거리를 기준으로 남쪽은 부유층, 북쪽은 ‘하꼬방’(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
물이 부족해 단수(斷水)인 날에는 남산 중턱 우물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나중에 구청에서 우물을 다 막았는데, 하나씩 없앨 때마다 주민들이 얼마나 반대했는지 몰라. 남산에서 용산고등학교까지 흐르는 후암천도 있었는데 그것도 나중에 다 덮었지.” 1967년 후암천 1500m 구간은 악취가 심해 복개됐다.
피란민들은 동네 어귀나 후암시장 등에서 좌판을 깔았다. 일부는 건설현장 노동자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후암시장에는 다른 시장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이북 음식이 많았다.
“옆집 아저씨도 후암시장에서 주먹만 한 만두를 빚어 팔았어. 실향민들이니까 다들 고향음식을 먹고 싶어 하잖아. 그나마 돈을 모은 사람들은 식당을 차렸고, 나머지는 콩나물을 기르거나 야채를 떼다가 길가에서 팔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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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오는 날은 동치미국수 먹는 날이었어. 지금도 겨울이면 꼭 해먹는 음식이야.”
○ 일제강점기, 일본 부유층이 모이다
후암동이란 이름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비는 두텁고 큰 바위인 ‘두텁바위’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지금도 동네를 유심히 살피며 걷다 보면 적산가옥(敵産家屋·광복 후 정부에 귀속됐다가 일반에 불하된 과거 일본인 소유 주택)을 볼 수 있다. 1910년 일본인 자녀들이 다니던 삼광초등학교(옛 삼판소학교)에서 조선총독부와 이어지는 삼판로(현 후암로)를 중심으로 일본식 주택이 들어섰다. 광복 이후 적산가옥에 사람들이 들어가 살았다. 현재 약 300채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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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적산가옥 상당수는 게스트하우스 또는 카페로 개조해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에까지 알려져 일본인 관광객들도 찾아온다.
○ 남산도서관에서 찾은 족보
오 씨는 주택가 길가에 꽃을 심는 ‘마을 꽃길 가꾸기’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오 씨가 맡은 구역은 후암교회에서 용산도서관으로 이어지는 골목. 그가 수십 년간 오르내린 길이다.
“있던 집을 허물고 또 집을 짓는데 어째 더 삭막해지는 것 같아. 예전에는 빈대떡이라도 부치면 무조건 옆집 가족들 것까지 넉넉히 만들었지. 그런 정을 나누던 사람이 거의 다 떠났어. 정이 넘치던 마을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싶어 꽃길 만들기에 동참했지.”
오 씨는 남산도서관을 올라 후암동을 내려다봤다. 남산도서관은 아버지와 자주 찾았다. “4남매 손을 잡고 남산도서관을 자주 오셨어. 실향민이라 뿌리를 찾아주고 싶으셨나봐. 족보에서 당신 이름을 발견해 우리에게 보여주셨어. 족보를 찾아볼 수 있는 남산도서관은 후암동 주민들에게 고향을 느끼게 한 곳이기도 해.”
오 씨는 고급 주상복합아파트와 다세대주택이 빼곡히 들어선 동네를 한참 바라봤다. “일제 때는 ‘부자동네’, 이후에는 피란민의 ‘제2의 고향’. 이런 두 얼굴을 가진 이 동네를 남은 일생 동안 잘 가꾸는 게 바람이야.”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