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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의 실록한의학]〈47〉예나 지금이나 ‘약재 신토불이’

입력 | 2018-03-12 03:00:00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고려 말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와 우리나라에 면직물의 자주화 시대를 열었듯, 한의학에서도 수입 약재의 국산화를 시도한 공신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20년의 기록에는 “성절사 의원(聖節使醫員) 이맹손(李孟孫)이 연경(燕京)에서 잡은 산 전갈 1백 마리를 조정에 바쳐 내의원과 대궐 내에서 기르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생전 처음 본 전갈을 신기해 한 성종은 “이 귀한 전갈을 어떻게 살려서 가져왔느냐”고 묻는다. 이에 이맹손은 “전갈을 잡아 궤(櫃) 속에 넣고 진흙으로 그 바깥을 발라서 흙이 마르면 물을 뿌리고 그 속에 먹을 것을 넣어주며 철망으로 그 바깥을 얽어서 빠져나오는 것을 막았다”고 답한다.

예부터 전갈은 넓디넓은 중국에서도 ‘만리(萬里)’나 떨어진 모래사막 지역에 사는 정말 보기 힘든 동물이었다. 아주 큰 숫자를 의미했던 ‘萬(만)’이라는 한자도 원래 전갈의 모양을 본떠 만든 상형문자였다. 전갈은 성종의 말대로 그만큼 귀한 약재였다.

전갈은 어둠 속의 사냥꾼으로 불린다. 빛 한 줌 없는 동굴에 살며 먹이를 사냥하다 보니 시력이 필요 없게 됐다. 그 대신 미세한 진동이나 바람을 감지하는 능력이 극대화됐다. 전갈을 예부터 ‘바람이 들어 생기는 병’의 치료에 쓴 이유도 그 때문이다. 풍담(風痰)이 경맥(經脈)에 침입해 입이나 눈이 삐뚤어진 질병을 가리키는 와사풍(구안와사)이나 귀에서 바람소리가 들리는 이명(귀울음) 또는 돌발성 난청에도 전갈이 어김없이 중심 약재로 들어간다.

전갈은 도저히 생물이 살 수 없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살아가는 특성 때문에 생기(生氣)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한의학은 전갈뿐 아니라 절벽이나 고산지대, 동굴, 사막 등 척박한 환경에서 처절하게 살아남은 생물들의 생기가 무서운 질병과 맞설 수 있는 약물의 효능을 배가시킨다고 본다. 역설적으로 척박한 환경이 드문 한국의 풍토나 지형에선 다양한 약재가 자랄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약재의 국산화가 한의학계의 숙원사업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국산화에 성공한 약초 중에는 감초도 있었다. 실록은 감초를 국산화하기 위해 태종, 세종, 문종까지 3대의 왕들이 한 노력을 일일이 기록해 놓았다. “개성 유후사 이문화(李文和)가 감초 1분(盆)을 바치자 소중하게 길렀다.”(태종 11년) “왜인이 헌납한 감초를 심어 전라·함길도 감사에게 기르도록 지시하였다.”(세종 30년) “전에 감초를 보낼 때에 땅의 성질이 기름진 곳을 가려서 나주(羅州)·진도(珍島)·광양(光陽) 세 고을에 심어서 기르게 하였는데 (중략) 나주·진도에 심은 것은 모두 다 살아서 번성하고 밤섬(栗島)에 심은 것도 해마다 번성하는데 홀로 광양에 심은 것만이 말라 죽었다.”(문종 1년)

감기나 전염병에 쓰이는 약재 마황도 원래 몽골지역에서 나는 귀한 약재였는데 세종 때 국산화에 성공했다. “경상 감사가 교유(敎諭) 박홍(朴洪)으로 하여금 장기(長기)현에 가서 마황을 캐 진상케 했는데 당(唐)나라의 마황과 다름이 없었다.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마황을 재배한 박홍이라는 자에게 옷 한 벌을 하사했다.”(세종 20년)

최근 들어 조상들의 노고로 어렵사리 국산화에 성공한 약초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원가를 줄이기 위해 한약을 과학화했다는 천연물신약에조차 중국산 한약재 추출물을 쓰고 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약초를 보호하고 육성할 책무는 국가에 있음을 되새겨야 할 때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