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동아일보]<12>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
1991년 3월 17일 열린 제62회 동아마라톤에서 김재룡, 이창우에 이어 3위로 골인하고 있는 황영조 감독(사진 왼쪽). 동아일보DB
이제 와서 얘기인데 마지막에 욕심을 좀 냈으면 우승도 가능했다. 하지만 김재룡, 이창우 등 당시 쟁쟁한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린다는 기분에 취해 있었다. 170여 m를 앞두고 김재룡 선배가 스퍼트 했을 때 아차 싶었다. 내 주특기가 스퍼트인데…. 그때 뒤쫓아 갔는데 역시 풀코스 연습을 하지 않아서인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 1등과 1초 차인 2시간12분35초로 3위, 이창우 선배와는 동타임이었다.
동아마라톤 3위로 내 인생은 바뀌었다. 한마디로 급이 달라졌다. 완주하기도 힘든 풀코스에 처음 도전해 3위라니. 당시 동아일보가 새겨진 금반지와 세탁기를 선물로 받았다. 반지는 은행 금고에 넣어 둘 정도로 애지중지 잘 모시고 있다. 세탁기는 시집간 누나에게 선물로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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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감독이 겨울 훈련지인 강릉의 한 식당에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 나온 동아일보 8월 10일자 1면 지면이 든 태블릿PC를 들고 웃고 있다. 강릉=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동아마라톤 3위가 없었다면 오늘의 황영조는 있을 수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동아마라톤은 모든 선수의 꿈이다. 꼭 달리고 싶고 우승하고 싶은 대회다. 그 대회에 처음 도전해 3위를 했다. 난 그때부터 그 무엇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은 동아마라톤이 만들어준 셈이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 선발전으로 열린 제67회 동아마라톤이 은퇴 무대가 됐다. 26km 지점에서 발바닥이 찢어졌다. 신발을 벗어 보니 피가 흥건했다. 당시 걷다시피 29위로 골인했다. ‘전년도 가을에서 당해연도 3월까지 기록으로 대표를 선발한다’는 대한육상경기연맹의 선발 규정에 따르면 난 1995년 가을에 뛴 기록으로 4위였다. 3명만 출전하는 올림픽에 갈 수 없는 상황. 솔직히 ‘황영조 정도면 선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었는데 연맹은 날 부르지 않았다. 올림픽을 위해 달려왔는데…. 더 달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은퇴했다. 공교롭게도 마라톤 데뷔와 은퇴 무대가 동아마라톤이 됐다. 어떻게 동아마라톤을 잊을 수 있겠는가.
황영조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