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인의 미식견문록
얼마 전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양식 셰프 세 사람이 마련한, 조금은 특별한 자리가 있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식진흥원이 주최한 ‘제2회 코리아 고메’의 일환으로 ‘한식, 세계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열린 갈라 디너였다. 한국인으로서 전통 식재료와 맛을 잘 이해하는 이탈리안 셰프와 프렌치 셰프가 그 나름의 방식으로 한식을 재해석해서 선보이는 이색적인 무대였다. 도전의 주인공은 바로 어윤권 진경수 김은희 셰프. 그들은 도합 70년 가까운 요리 경력으로 1세대 서양 요리사들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만큼 이번에 이들이 선택할 식재료와 잉태해낼 코스 요리에 관심이 모아졌다.
결과는 어떠했을까. 한국 전통장과 식재료를 자신의 요리 테크닉과 어떻게 융합시킬 것인지를 한 달 동안 진심으로 고심했다는 어윤권 셰프, 시장에서 발견한 우리 곡물 및 뿌리채소와 최근 심취한 전통주와의 페어링에 밤잠을 설쳤다는 김은희 셰프, 제주와 전라의 가을을 고스란히 접시에 담기 위해 한국 식재료를 탐구했다는 진경수 셰프.
그렇게 그들의 고심과 시도 끝에 차려진 테이블은 한식과 양식의 마리아주(Mariage)라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다. 국적 없는 요리가 되거나 툭 튀어나와 겉도는 한식이 아니라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꼭 필요한 지점에 탄탄한 서양식 조리법이 결합되어 맛의 지경을 넓히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세계로 한식을 소개하고 한식으로 세계를 초대하는 ‘한식, 세계와 만나다’에 꼭 맞는 발견이 아닐까. 한식의 미래이자 예고편일지도 모를 의미 있는 메뉴를 하루 경험으로 보내기엔 너무 아까워서 기록으로 남겼다. 독자 여러분을 그날의 자리로 초대한다.
“제철 식재료가 좋은 요리를 만든다” 이탈리안 셰프가 변주한 한식
한식의 조리법을 활용한 이탈리안 요리사 어윤권 셰프. 바앤다이닝 제공
30년 요리 경력을 보유한 베테랑이지만 그에게도 한식과 이탈리안의 접목은 새로운 시도였다. 그만큼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이탈리아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재료만 한국의 것을 쓰는 데에서 나아가 ‘어윤권 스타일’의 뉴 코리안 이탈리안 요리를 만들어내려 노력했다고. 이번 결과물에 대해서는 ‘또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 느낌’이라고 자평했다.
리스토란테 에오의 갈라 디너, 이탈리안 셰프가 변주한 한식.
코스를 마무리하는 디저트로는 치즈 세 종류와 과일 화채, 배로 만든 젤라토를 전통주 ‘자주’와 함께 내놓았다.
“한식의 재료와 조리 방식을 기반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 재료의 온도에 변화를 주고 색감과 식감을 극대화한 요리를 만들었어요. 특히 ‘자주’와 디저트 메뉴의 페어링은 이탈리안 다이닝과 한국 전통주가 서로 돋보일 수 있도록 고민했던 흥미로운 작업이었습니다.”(어윤권 셰프)
“새로운 가치와 다양성으로의 여정” 프렌치 셰프가 그려낸 한국의 가을
제철 식재료에 한국 전통주를 페어링한 김은희 셰프. 바앤다이닝 제공
갈라 디너의 메뉴는 제철 식재료인 가을 버섯과 과일, 뿌리채소, 우리 곡물과 해산물, 나물 등을 풍부히 사용해 이번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가을 정식 신메뉴로도 이어질 수 있게 탄탄하게 구성했다. “한국에서 프렌치 요리를 하며 질 좋은 프랑스의 현지 식재료를 구하기 힘들다는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런데 잠시 눈을 돌려 한국 식재료로 관심을 돌려보니 새로운 가치와 다양성이라는 신세계를 발견할 수 있었죠.”
셰프는 이번 갈라 디너 메뉴명을 ‘더 그린 테이블의 가을 메뉴와 전통주의 만남’이라고 붙였다. 한국의 제철 식재료와 전통주의 페어링은 국내 프렌치의 새로운 가치와 다양성의 발견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더 그린 테이블의 갈라 디너, 가을 메뉴와 전통주의 만남.
디너 주제를 가장 잘 나타내는 요리는 단연 가을 식재료가 듬뿍 담긴 한우 타르타르와 우리 곡물 리조토다. 한우 타르타르는 1+ 등급의 한우 홍두깨살에 참마와 사과, 표고버섯, 허브 등을 다져 넣고 아이올리 소스를 얹었는데, 입안에서 갖가지 식재료가 어우러지며 섬세하면서도 다양한 풍미를 자랑했다. 곁들인 간장 젤리도 인상적이다. 우리 곡물 리조토는 보리, 조, 차조 등 5가지 우리 곡물에 바지락 육수를 듬뿍 넣어 만들었다. 요리명은 리조토지만 버터 대신 바지락 육수를 넣어 육수가 내는 달큰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디저트와 페어링된 전통주도 주목할만 하다. 섬세한 맛을 위해 무화과와 파이를 따로 조리해낸 무화과 타르트와 부드러운 텍스처의 연시 소르베로 이뤄진 디저트는 청감주와 함께 곁들여져 나왔다. 이는 놀랍게도 소테른 와인처럼 깔끔한 단맛이 나와 좋은 마리아주를 이끌어냈다. 마들렌, 초콜릿, 마카롱으로 구성된 프띠프르와 오디청을 얹은 이화주 페어링으로 마지막까지 감동이 멈추지 않으며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시장 가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시장에는 익숙하지 않은 다양한 우리 곡물과 나물, 뿌리채소들이 가득한데 프렌치의 조리법으로 새롭게 해석하면 한국의 맛과 프랑스의 맛이 더해져 새롭고, 맛있고, 재밌는 요리가 탄생하죠. 프렌치를 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요리라고 생각해요.”(김은희 셰프)
“가을 식재료와 마주하다” 접시 위에 그려낸 한식과 프렌치의 마리아주
제주와 전라도의 제철 식재료에 주목한 진경수 셰프. 바앤다이닝 제공
코스 메뉴에서 제주산 당근과 고사리, 영암 무화과, 제주 뿔소라 등이 눈에 띄었다. 셰프는 가을의 제주와 전라도 풍경을 상상하면서 지금 두 지역에 가면 볼 수 있는 식재료를 먼저 떠올렸다고 한다. 어떤 이유로 두 지역을 선택했냐는 질문에 “제주는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고, 전라도는 여러 번의 미식 여행을 통해 경험을 쌓아두었기 때문에 머릿속에 많은 정보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가장 잘 알고 있고, 잘할 수 있는 두 지역을 골랐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주 당근으로 만든 트윌, 영암 무화과와 브리치즈 그리고 토종꿀 등으로 시작한 아뮈즈가 코스의 시작을 알렸다. 도수가 낮고 달달한 청감주가 아페리티프로 함께 나왔다. 첫 번째 전채요리는 제주 뿔소라다. 오독오독한 씹는 맛이 재미있는 뿔소라는 한 번 삶은 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수비드해두었다가 다진 마늘과 버터로 만든 소스에 가리비와 함께 볶아냈다. 청양 고추를 넣어 버터의 느끼함을 중화시킨 소스도 한층 어울렸다.
두 번째 전채는 자연산 민어에 찰보리, 제주 톳을 사용해 만든 보리 리조토로 다양한 제주 해산물들을 사용해 제주 바다의 향을 접시에 담았다. 전채 요리의 마지막으로는 제주 흑돼지 목살 요리로 목살은 올리브 오일과 타임에 마리네이드 했다가 프렌치 정통 조리법으로 오븐에서 구워내고, 식초와 간장 베이스로 셰프가 직접 양념해 3일 이상 숙성시킨 고사리 장아찌를 그 위에 올렸다.
라싸브어의 갈라 디너, 가을이 오면.
국내산 한우, 호주산 양갈비 스테이크 등으로 구성한 메인을 거쳐 식사는 마지막인 디저트에 도착했다. 우유에 불려둔 흑미를 약불에서 뭉근하게 졸여 익힌 흑미 푸딩에 제철 과일을 올려낸 디저트는 쌀의 식감을 잘 살려내 갈라 디너의 마침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앞으로도 국내 로컬 식재료를 탐구하고 프렌치와 접목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겠다”는 진경수 셰프의 소감처럼 세계로 한식을 소개하고 한식으로 세계를 초대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우리 한식의 가능성을 더욱 흥미롭게 펼쳐 가리라 기대해본다.
“여행하듯 전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식재료를 찾아다니는 일은 정말 흥미로워요. 내가 태어난 제주는 물론 전국 8도에 숨어 있는 다양한 제철 식재료를 찾아 새로운 요리들을 선보여 코리안 프렌치에 한 획을 긋고 싶어요.”(진경수 셰프)
박홍인 바앤다이닝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