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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전문기자의 맨 투 맨]공기처럼 배려하고 물처럼 빠져라

입력 | 2017-11-22 03:00:00


‘갑질’ 논란을 불러온 모 병원 간호사들의 장기자랑 광경. 페이스북 캡처

이형삼 전문기자

L 씨(25)는 5년 전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고 병원에 취업했다. 신참에게 주어진 온갖 허드렛일을 ‘몸으로 때운다’는 각오로 해냈지만 몸으로 못 때울 첫 관문이 있었다. 채혈이었다. 자격증을 따기 전 딱 한 번 실습한 게 전부였다. 병원에선 웬만큼 숙달될 때까지는 환자 채혈을 허락하지 않았다. 냉정한 선배 간호사들은 “나 하는 거 잘 보란 말이야”라며 다그치기만 했다. 누군가가 “집에서 부모님 영양제 주사 놔드리며 채혈도 해 봐”라고 조언했지만 가족 몸에 바늘을 들이대는 건 더 떨렸다.

그 무렵 다른 층에서 근무하던 피부관리사가 L 씨가 일하는 층에 들렀다가 사연을 듣고는 대뜸 왼팔을 걷어 보였다. “이걸로 연습해 봐. 내 팔에서 (피를) 잘 뽑으면 다른 사람은 다 뽑아.” 팔이 통통해서 혈관이 잘 안 드러나기에 연습용으로 제격이라고 했다. 혈관을 제대로 잡을 때까지 몇 번을 찔렀어도 그는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그래놓고는 이튿날에도 찾아와 오른팔을 내밀었다. 전날 혈관을 잘못 건드린 왼팔엔 멍이 퍼렇게 들어 있었다. 오른팔 채혈에 성공하자 이번엔 손등에서도 뽑아 보라고 했다. 집중적인 반복 실습 덕분에 L 씨는 곧 ‘실전’에 투입됐다.

다음의 두 일화는 오래전 외지에 실린 사연이다.

미국인 여학생 A는 영국의 삼촌 집에서 대학을 다녔다. 어느 날 A의 농담이 오해를 키워 삼촌을 격분케 했다. 삼촌은 “내 가족과 다시는 말을 섞지 말라”고 했다. A는 런던의 친구 집으로 거처를 옮기려고 짐을 꾸려 나왔다.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타는데, 서러움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필 엘리베이터도 작동되지 않았다. 무거운 가방을 끌고 계단을 오르려니 눈물은 더 쏟아졌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가방을 들더니 계단 위에 가방을 놓고 사라졌다. 그가 계단 앞에 설 때마다 같은 일이 반복됐다.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얼굴은 못 봤지만 매번 다른 사람의 손이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심스럽게 손을 내주고는 제 갈 길을 갔다. 10여 년 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A는 워싱턴의 지하철을 탈 때마다 누군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가 없는지 승객들을 유심히 살펴본다.

이사 준비에 한창이던 B는 고향의 어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남동생 부부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망연자실해 이삿짐 상자에 주저앉았다. 내일 입고 갈 옷이 어느 상자에 있는지도 몰랐고, 집 안은 빨래 더미와 설거지감, 아이들 장난감으로 어수선했다. 남편이 몇 군데 전화를 돌려 사정을 알렸다. 몇몇은 B에게 위로전화를 걸어왔다. 다들 “도울 일 있으면 얘기해”라고 했지만 경황이 없어 “고맙다”고만 했다.

늦은 밤,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엔 C의 남편이 서 있었다. 같은 교회를 다니지만 자주 보던 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구두를 닦아드리러 왔다”고 했다. 귀를 의심하는 B에게 “선친이 작고했을 때 장례식에 신고 갈 아이들(6남매) 신발을 손질하느라 애먹은 생각이 났다”고 했다. 그는 주방 바닥에 신문지를 펴고 B 부부의 정장 구두며 일상화, 아이들의 진흙투성이 신발을 닦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B도 마음을 추슬러 집 정리를 했다. 몇 시간 후 주방에 가보니 C의 남편은 반들반들한 구두들을 가지런히 늘어놓고 돌아간 뒤였다. B는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예수를 떠올렸다.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 기꺼이 손을 내밀어준 이들이 그저 얼굴 몇 번 봤을 뿐인 사람들, 혹은 그런 인연조차 없는 남들이었다는 게 놀랍다. 그들은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고, 부담을 주지도, 생색을 내지도 않았다.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뭘 도와줄까”라고 묻지도 않는다. 공기가 와 닿듯 ‘쿨’하게 배려하고 물처럼 빠져나간다. 보잘것없는 재주 좀 깨우쳐 준답시고 후배와 제자를 종처럼 부려대는, 정말 ‘남보다 못한’ 이들에게 들려주고픈 얘기들이다.

‘도제식 교육’으로 포장해 약자를 옭아매는 위계질서는 자신의 알량한 재주를 못 넘어서게 쌓아올린 진입장벽이라고 본다. 그 안에선 갑도 을도 발전할 수 없다. 원로 뇌과학자 조장희 박사는 윈윈에 도달하는 넛지(nudge·좋은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의 생생한 사례를 들려준다.

“제자들이 처음엔 내게 말도 못 붙였다. 그들을 나와 논문을 함께 쓰는 동료로 여겼다. 연구는 열심히 하는데 글을 잘 못 쓰는 친구, 좀 게으르지만 핵심을 잘 추려내는 친구도 있다. 그들의 장점이 팀워크로 녹아들게 리드했다. 얼마 후엔 그들이 내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리드했다.”
 
이형삼 전문기자 han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