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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도서관]암담한 젊음의 언어 속에 어찌할 수 없는 아름다움…기형도 ‘안개’

입력 | 2017-11-21 16:45:00

기형도 시인은 요절했지만 그의 시는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다.동아일보DB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기형도의 시 ‘안개’ 중에서


서울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사내가 숨졌다. 신문사 기자였고 등단 4년째인 젊은 시인이었다. 그가 준비하던 첫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유고 시집이 됐다. 기형도(1960~89) 얘기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빈집’)에서처럼 ‘안개’는 기형도 시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자 그의 시 세계 상징이다.

‘안개’도 그렇다.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이나 ‘노랗고 딱딱한 태양’ 같은 시구에서 짐작되듯 기형도가 내보이는 시 세계는 음울하고 쓸쓸하다. 안개 속에서 이동하는 이들은 여공들, 어린이들. 얼핏 수식어가 바뀐 듯한 ‘깔깔거리는 여공’과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아이들’은 그 바뀐 듯한 수식어로 인해 절묘하게도 처연한 느낌이 전달된다.

‘안개’는 산업화에 대한 비판으로 자주 해석된다. 하지만 기자에게는 이 시가 앞을 볼 수 없는 막막한 청춘의 중얼거림으로 읽힌다. 시인 자신이 젊은이였음에도 그가 쓰는 젊음의 시편들은 암담하다.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질투는 나의 힘’)라든지,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대학시절’) 등이 그렇다.

기형도의 신춘문예 등단작 ‘안개’가 실린 동아일보 1985년 1월 5일자 9면.


그런데 그 암담한 젊음의 언어 속에 어찌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것이 기형도 시의 매혹이고 많은 독자를 오래도록 사로잡는 이유일 것이다.

‘안개’는 기형도의 등단작이다. 그는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왔다. 이즈음 신춘문예 공고가 뜨면 많은 문청(문학청년)들이 신문사로 원고를 보낸다. 문학의 죽음이 운위되는 시대에도 시인과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꿈은 강렬하다. 기형도 시와 같은 ‘오래도록 바래지지 않는, 어찌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문학을 향한 이들의 열정의 한 이유일 것이기에….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