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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공물 목재 물길로 옮겨… 한번 작업에 군수월급 3배

입력 | 2017-11-20 03:00:00

‘떼꾼’




1930년대 뗏목 형태로 압록강을 흘러 내려가는 목재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료

“황새여울 된꼬까리에 떼를 지어 놓았네, 만지산 전산옥(全山玉)이야 술상 차려놓게….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뜬구름만 흘러도, 팔당주막 들병장수야 술판 벌여 놓아라.” ―‘정선 아리랑’에서

조선 초부터 강원도와 충청도에서는 목재를 공물로 바쳤다. 전국 각지의 나무가 서울로 모였다. 당시에는 물길이 지금의 고속도로 역할을 했고, 목재도 뗏목으로 엮어 물길을 따라 보냈다. ‘떼꾼’은 뗏목을 타고 나무를 옮기는 일을 했다. ‘세종실록’에는 강원도 백성들 중에 떼꾼으로 업을 삼은 이가 많다고 나온다.

가을에 베어놓고 눈 녹으면 옮겨… 일 위험한 만큼 보상도 커

그러나 강 연안에 사는 모리배들이 공갈로 나무를 빼앗거나 대금 지급을 미루고 헐값에 강매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탐관오리들은 강원도의 산을 민둥산으로 만들 정도로 남벌을 일삼았고, 떼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세금을 거두기도 했다. 세조와 성종 때는 나라에서 쓸 나무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적인 벌채를 금지하기도 했지만 탐관오리는 이 명목으로 떼꾼들의 나무를 빼앗거나, 떼꾼을 가두어 매를 치고 속전(贖錢)까지 요구하며 괴롭혔다.

떼꾼의 작업은 가을에 나무를 12자(약 4m) 길이로 베어두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듬해 봄눈이 녹아 길이 미끄러워지면 이를 산 아래의 강어귀로 내려보냈다. 떼는 12∼15동가리로 엮어 기차와 같은 모양으로 연결했다. 보통 30m가 넘었는데 이것을 한 바닥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한 바닥의 떼를 운행했는데, 앞 사공은 물길을 잘 알아야 해서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맡았고, 뒤쪽 사공은 키를 잡아야 하므로 힘 좋은 사람이 맡았다.

떼는 얼음이 녹는 4월경부터 내려보냈다. 출발할 때 떼꾼에게 얼마 분량의 나무가 내려간다는 도록을 적어주고, 나무를 분실하면 배상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워낙 위험한 일이 많아서 몇 동가리 정도의 손실은 눈감아 주었다.

물이 많을 때는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일주일이면 갈 수 있었지만 물이 적으면 한 달이 걸리기도 했다. 문제는 곳곳에 숨어 있는 돌부리와 여울이었다. 돌부리에 걸리면 떼를 묶었던 부분이 찢어져 나무를 잃어버리거나 물살이 센 여울에 휘말리면 떼꾼도 물에 빠져 죽을 수 있었다.

위험한 일이었던 만큼 보상도 컸다. 1864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동강에서 한강 일대는 떼꾼으로 넘쳐났다. 당시 군수 월급이 5원이었는데 한 번 떼를 타면 15원을 받았다. 많으면 1년에 7번 넘게 왕복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떼돈’을 벌 기회였다.

남한강 가에 즐비한 주막에서는 떼꾼이 지날 때마다 술과 노래로 유혹했다. 큰돈을 벌어 씀씀이가 헤퍼진 떼꾼들이 주색에 빠지거나 노름판에서 돈을 탕진하기도 했다. 강에 다리가 놓이고 보가 설치되면서 떼꾼은 점점 줄었다. 1960년대 말 팔당댐이 건설돼 물길이 막히자 완전히 사라졌고, 지금은 떼꾼이 즐겨 부르던 아리랑만 남아 있다.

김동건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