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루터의 도시를 가다] <上> 비텐베르크-아이제나흐
독일 비텐베르크시청 광장에 있는 마르틴 루터 동상. 1821년 세워졌다. 같은 광장 옆엔 필리프 멜란히톤의 동상도 있다. 바로 인근엔 루터가 처음으로 독일어 설교를 했던 ‘성 마리아 시립 교회’도 있다. 비텐베르크=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지난달 26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새벽안개를 헤치고 약 460km를 달려 마주한 비텐베르크는 역시 루터의 도시였다. 원래 정식 지명도 ‘루터슈타트(Lutherstadt·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인 이곳은 평일 오전인데도 세계 곳곳에서 몰려든 이들로 북적였다.
미국의 성지순례 일행인 제니 리들리 씨(62)는 “평생의 믿음이 태동한 성지(holy land)를 드디어 찾아 너무 행복하다”며 “루터의 용기로 평신도도 하나님을 가까이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95개 논제를 써 붙였던 성교회의 대문. 1858년 청동 대문으로 바꾸며 논제 전문을 새겼다. 비텐베르크=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교회에서 걸어서 10여 분 거리인 박물관 ‘루터하우스’도 역시 방문객으로 북적였다. 당시 루터가 속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이 현대에 와서 바뀐 모습이다. 루터가 번역한 1534년 판본 독일어 성경과 초상화 등 귀중한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최근 박물관은 1525년 루터와 결혼한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 전시실을 따로 개장했다. 루터하우스 측은 “루터가 갖은 박해로 벌이가 시원찮을 때, 농장과 공방을 경영하며 남편을 뒷받침한 부인의 공이 컸다”고 설명했다.
○ 아이제나흐-잉크로 악마와 싸우다
다음 날 찾은 아이제나흐는 실은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뒤 1521년 10개월 정도밖에 머무르지 않았다. 당시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가 교황청에 항거한 그에게 추방령을 내려 도망자 신세였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루터는 이곳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최고의 역사적 업적을 남겼다. 그해 9월 완성해 ‘9월 성경’으로 불리는 독일어 신약성서를 완역한 것이다. 구텐베르크 인쇄술 덕에 전국으로 퍼진 성경은 종교개혁 확산의 결정적 도화선이었다.
▼ “1년 내내 기념전-콘서트… 방문객 벌써 작년의 倍” ▼
지난달 26일 만난 독일 비텐베르크 루터하우스의 베냐민 하셀호른 총괄매니저(사진)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말투였다. 베를린 훔볼트대 신학박사인 그는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구원에 이른다는 혁명적 인식의 전환을 인류에게 선사했다”고 평가했다.
―루터의 주장은 지금도 유효한가.
“물론이다.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경. 그때나 지금이나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나. 물론 세부적 가치나 해석은 세월이 흐르며 조금씩 바뀌었다. 그러나 루터는 신을 대신해 면죄부를 파는 교황청의 가치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신 앞에 선 한 인간이란 ‘단독자’ 개념을 세웠다. 이는 근대는 물론이고 현대 문명의 기반과도 직결된다. 개인의 탄생이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종교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500주년을 맞은 현지 분위기는 어떤가.
“교회는 물론이고 정부도 적극적이다. 이곳을 비롯해 독일 곳곳에서 기념 전시와 콘서트가 1년 내내 이어지고 있다. 비텐베르크는 해마다 약 20만 명이 방문하는데, 올해는 벌써 두 배가량 찾아왔다. 다만 젊은층에서 관심이 높지 않은 건 이곳에서도 큰 고민거리다. 끊임없이 변화에 목마른 모습을 보여야 하는 이유다. 루터가 현재에 안주했다면 개혁이 가당하기나 했겠나.”
비텐베르크·아이제나흐=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