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조선의 잡史]수레 운임, 무명 2필… 사람 치어 유배도

입력 | 2017-09-25 03:00:00

‘운송업자’ 차부




한 남자가 소달구지를 끄는 소의 고삐를 쥐고 있다. 사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용산의 한 차부가 서울 성중으로 짐을 운반하고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 대개 죄수가 형장으로 끌려갈 때 용산 차부가 수레로 실어가는 것이 상례였다.”(구수훈의 이순록·二旬錄에서)

조선시대 사람이나 화물을 운반하는 운송업자를 차부(車夫)라 불렀다. 이들은 조선 초기 문헌부터 적지 않게 등장한다. 특히 용산 지역에는 일찌감치 많은 차부들이 자리를 잡았다. 예종실록에는 용산 차부들이 살인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기록이 등장하고, 18세기 구수훈이 지은 ‘이순록’에는 용산 차부들이 사형수를 전문적으로 이송했다고 나온다.

1602년 한성부에 속한 차부는 11명이었다. 1698년에 편찬된 수교집록(受敎輯錄)에는 총융청과 수어청에 각각 한두 명의 차부를 정식으로 두었다고 기록돼 있다. 차부들은 화물을 운송하기도 했지만 정부의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한성부와 민간의 차부들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다. 심지어 세 수레에 실을 양을 한 수레에 다 실으라고 강요받는 경우도 있었다. 고역을 참지 못한 차부들이 도망을 치기도 했다.

정조는 화성 성역화 공사에 차부를 대대적으로 고용했다. 1794년 9월 16일부터 1796년 8월 19일까지 공사에 투입된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었다는 기록이 13회에 걸쳐 날짜별로 정리됐는데, 이 중 10회에 차부들이 등장한다. 모두 646명이 동원됐으니 회당 평균 64.6명이다. 떡, 수육, 술, 생선류가 이들에게 먹을 것으로 제공됐다. 승정원일기에는 차부가 수레로 옮길 수 있는 양과 운송료가 기록돼 있다. 수레 한 대당 실을 수 있는 짐은 쌀 10섬, 운송료는 무명 2필 정도였다. 차부 중에는 수레와 소를 모두 소유한 운송업자도 있었지만 관청 소유의 수레를 자신이 가진 소로 끄는 경우도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운송수단과 화물 종류에 따라 차부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정치가 아키야마 사다스케(秋山定輔)가 창간한 니로쿠(二六) 신보(新報) 1894년 11월 28일 기사에는 인력거부(人力車夫)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조선의 자료 역시 이 시기 전후부터는 일관되게 우차부(牛車夫)와 인력거부를 구분해 사용했다. 1906년에 발표된 칙령 제81호 ‘지방세 규칙’은 운송사업 분야를 교자세(轎稅), 인력거세, 자전거세, 짐수레세(荷車稅)로 구분해 과세했다.

차부 중에는 인력거로 사람을 치는 교통사고를 내 유배를 가거나 단발령을 거부해 투옥된 이들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차부는 조합을 설립하여 운송업을 조직화하고 사업 영역을 확고히 하면서 전문적인 직업으로 자리 잡았다.
 
강문종 제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