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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진영]“난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

입력 | 2017-09-21 03:00:00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요즘 독일 사내아이들은 “남자도 총리가 될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고 한다. 유럽 최강국인 독일의 총리는 13년째 앙겔라 메르켈(63)이다.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인 그가 24일 총선에서 4연임에 성공하면 재임 기간은 16년으로 늘어난다. 독일 최장수 총리인 헬무트 콜과 같은 기록이다.

그런데 독일 여성들의 반응은 떨떠름하다. 여성 총리 덕을 보기는커녕 그의 집권기에 여권 수준은 오히려 뒷걸음질쳤다. 세계경제포럼의 성 격차 지수 나라별 순위에서 독일은 그가 집권한 이듬해인 2006년 5위였으나 2016년엔 13위로 떨어졌다. 뉴욕타임스는 “독일에선 남자 총리를 상상하기 어렵듯 여자 최고경영자(CEO)를 상상하는 일도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여성들은 메르켈 총리가 페미니스트라고 공언하지 않는 것도 불만이다. 그는 올 4월 주요 20개국(G20) 여성경제정상회의에서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페미니즘의 취지에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개인적으론 그 배지(페미니스트)를 달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요즘 세상에 “난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고 할 정신 나간 정치인이 있을까. 놀란 사회자는 참석자들에게 “페미니스트인 사람들은 손들어 보라”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딸 이방카도,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 총재도 손을 들었지만 메르켈 총리는 끝까지 가만히 있었다.

혹자는 메르켈 총리가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발했던 동독 출신이어서 여성 문제에 무신경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그는 무심한 게 아니라 실용적인 쪽이다. 1990년 기독민주당에 입당한 그는 멘토였던 콜 총리의 ‘마이 걸’이라는 애칭을 참고 들었다. 스스로 교묘하게 퍼뜨리고 다닌다는 비난도 들었다. 동독의 신교도 여성으로서 서독의 가톨릭 남성 정당에서 뿌리내리기가 절실하던 초짜 시절이다. 2005년 총선에선 “내가 당선되면 양성평등의 자극제가 될 것”이라며 페미니즘에 호소했다.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카드가 먹히던 때다. 그땐 외모도 꾸미고 다녔다. 드디어 1인자 자리에 올라 국정을 책임지게 된 후로는 늘 똑같은 머리 모양에 바지 정장을 입는다. 독일의 젠더 역사학자인 우테 프레베르트는 “메르켈은 웃지도, 여자 티도 내지 않는다. 남자 흉내를 내는 것도 아니다. 젠더 중립적”이라고 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중성화는 1인자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대통령제와 달리 다양한 정치 세력과 연정해야 하는 의원내각제에 잘 먹히는 전략 같다. 중도우파인 메르켈 총리는 낮은 자세로 진보적인 사회민주당 및 녹색당과 정책을 조율해 가며 최악의 금융위기를 포함한 국내외 난제들을 해결해 왔다. 그의 조용한 리더십에 대해 BBC뉴스는 “문제를 수동적으로 해결만 할 뿐 새로운 비전이나 정책을 제시하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수비형이 공격형보다 시원한 맛은 없어도 실점이 없는 법. 메르켈 총리는 집권 12년간 지지율이 46%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다(독일 공영방송 ARD 조사).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메르켈 총리의 성공은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며 미국 대선에 도전했던 힐러리 클린턴의 실패와 비교된다. 메르켈은 정체성 정치의 덫에 빠지지 않고 실용주의 전략으로 장기집권하고 있다. 여당에서 메르켈 외에 대안이 없는 것이 우연일까. 후계자를 키우지 않는 마키아벨리스트의 면모를 그는 포커페이스에 용케도 숨겨 왔다. 클린턴은 졌지만 ‘유리천장’ 연설로 기억된다. 메르켈 총리는 여성 문제에 소홀했던 정치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동시에 가장 오래 살아남았던 여성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