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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용]워싱턴 레스토랑 ‘꼼수 청구서’

입력 | 2017-08-26 03:00:00


박용 뉴욕 특파원

미국인들은 식당에서 밥값을 낼 때 계산서를 꼼꼼히 챙겨 본다. 세금과 종업원에게 줄 봉사료(팁)까지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각종 비용을 더하면 음식값은 메뉴판보다 20% 넘게 올라간다.

브라이언 씨도 그랬다. 그는 얼마 전 워싱턴의 고급 해산물 레스토랑 체인점인 오셔네어에서 식사를 마치고 계산서를 건네받았다. 내야 할 돈을 찬찬히 살피던 그는 낯선 문구를 발견했다.

“최저임금 인상 등의 비용 상승 때문에 3% 부가요금을 청구합니다.”

이 식당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부가요금이 있다는 걸 메뉴판 등에 알리지도 않고, 계산서에 슬쩍 올려놓았다. 브라이언 씨는 이 ‘꼼수 청구서’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렸다. 사람들은 “근근이 살아가는 종업원들만 비난을 받게 만든 처사” “사기나 다름없는 행동”이라며 흥분했다.

미국인들을 더 화나게 한 건 이 레스토랑 체인의 모회사인 랜드리스의 최고경영자(CEO)인 틸먼 퍼티타의 과거 발언 때문이었다. 미국 최고의 외식업 부자인 그는 주식 가치만 3억 달러에 이른다. 그는 2014년 CNBC 방송에 출연해 “최저임금 인상에 불만이 없다. 고객들도 ‘왜 음식 가격을 올렸느냐’고 따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놓고선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은 음식값이 싼 것처럼 메뉴판 가격은 유지하면서 최저임금 인상 비용은 종업원 핑계를 대며 고객에게 떠넘기는 꼼수를 부린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억만장자가 소유한 레스토랑이 최저임금 비용을 청구했다”고 비판했다.

당당하지 못한 오셔네어의 꼼수와 말과 행동이 다른 대기업 CEO의 행태에 비난이 쏟아진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걸로 모든 일이 다 말끔해지는 건 아니다. ‘누군가는 최저임금 인상 청구서에 지불해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셔네어가 내민 ‘진짜 청구서’다.

한국에서도 내년에 ‘최저임금 인상 청구서’가 날아든다. 최저임금이 올해 6470원에서 내년엔 7350원으로 16.4% 오른다. 이렇게 큰 폭으로 최저임금이 오른 적은 여태 없었다. 정부가 ‘최저임금 1만 원’이라는 목표에 집착할수록 청구서는 더 쌓여 갈 것이다. 급격한 변화에 대비하지 못한 자영업자들은 ‘오셔네어 꼼수’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최저임금 인상을 주도한 정부도 난감하다. 한 경제 관료는 “영세 사업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미국식 팁 제도까지 고민해 본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영세 고용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지난 10년간 평균인상률을 상회하는 인상분에 대해 재정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정부가 북 치고 장구 치며 최저임금 인상 청구서까지 대납해 주겠다는 것인데, 나라 재정을 생각하면 오래 버틸 수 있는 대책은 아니다.

정부가 구상하는 소득주도 성장의 ‘소득’은 나라 곳간보단 시장에서 나와야 더 설득력이 있다. ‘최저임금 인상 청구서’를 기꺼이 부담할 사장님이나 손님이 없으면 소득주도 성장으로 가는 길은 험난해진다. 미국 미주리주 등 일부 지역은 누가 청구서를 부담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해 최저임금 인상을 원점으로 돌리는 ‘역주행 압력’을 받고 있다.

대통령직속 일자리위원회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가설로만 존재하는 소득주도 성장을 입증할 밑천을 만드는 일이다. 지난 100일간 공무원 일자리를 늘리고 세금으로 청구서를 대납하는 정책을 무더기로 쏟아냈으니, 시장에서 일자리와 소득이 만들어지도록 북돋는 일이 남았다. 돈 잘 버는 회사 옆에 고급 식당이 몰리는 게 정부 보조금 때문이 아니라는 건 이용섭 부위원장도 모를 리 없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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