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극인 산업부장
사장님에게 핀잔주는 신입사원. 영화에서나 가능한 얘기라고 하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일본에서는 상대의 지위 고하와 나이를 막론하고 손님을 상석에 앉히는 문화가 있다. 기자도 약속 장소에 갔더니 머리가 하얗게 센 일본 신문사 회장이 상석을 비워 놔 어쩔 줄 몰라 했던 기억이 있다. 나이나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 자리의 내용에 충실한 문화는 수평적인 대화를 원활하게 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한국에서 독불장군으로 비치지만 그가 몇 년 전 휴양지에서 참모진과 찍은 사진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주 앉은 참모들이 소파에 팔을 걸치고 다리를 꼰 채 배를 내밀고서 대화하는 모습이었다. 사진만 봐서는 위아래가 따로 없다.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지만 수평적으로 관계를 맺는 문화는 발달하지 못한 듯하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나이부터 물어 기필코 위아래를 확인한다. 이런 분위기는 사회 곳곳에서 목격되는데 재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과거 정권에서 재계를 대표해 온 전국경제인연합회에는 오래된 묵시적 룰이 있었다. 정권이 바뀌어 총수들이 대통령을 만날 때 덕담은 재계 서열순으로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행여나 대통령이 불편해할 건의를 할 때는 재계 서열과 거꾸로 발언 순서가 돌아간다. 정부의 협조 요청에 따른 사회공헌이나 후원금 액수는 재계 서열에 따라 대략적인 비율이 정해져 있다. 단체 사진을 찍을 때도 서열에 따라 서는 자리가 정해진다. 간혹 이를 어기고 ‘오버’ 하는 총수도 있었지만 영락없이 구설에 올랐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 정부가 경제를 이끌면서 형성된 수직적 문화가 내재화한 것이다.
하지만 포장은 포장일 뿐. 내용을 뜯어보면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현 정부에서 추진하는 대기업 규제와 법인세 인상, 원전 가동 중단 등 핵심 현안에 대한 얘기는 변죽도 못 울렸다. 이미 결론이 나 있어 얘기해 봤자 본전도 못 건진다는 지레짐작 때문이었을 게다. 그 대신 대통령은 패러다임 전환과 기업들의 협조를 요청했다. 반론을 제기하는 기업인은 없었다. 결론을 내놓고 명분을 만들기 위한 일방통행식 만남이었다는 뒷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포장만 달랐지 현 정부도 다른 형태로 권위주의의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 걱정스럽다.
소통은 대개 권력을 쥔 쪽에서 멍석을 깔아줄 때 가능하다. 이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할 말은 할 수 있게 하는 수평적 리더십이다. 다음 만남부터는 대통령이 민감한 현안도 툭 터놓고 얘기하는 분위기를 앞장서 조성했으면 한다. 어떤 얘기든 들으면 들을수록 정책은 단단해지고 실패 확률은 줄어든다. 나라 잘되는 길이다.
배극인 산업부장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