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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기업에 피해입은 증거 내야 조정”… 공정거래조정원의 또다른 ‘갑질’

입력 | 2017-07-25 03:00:00

첨예한 사안은 미온적 대응… “공정위서 따져보라” 떠넘겨




A 씨는 지난해 4월까지 산업용 접착제 도매상을 운영하며 전자부품 제조사들에 접착제를 팔았다. 그해 5월 A 씨에게 접착제를 공급하던 회사가 B사에 독점 공급권을 주면서 고통이 시작됐다. B사는 A 씨에게 거래처 및 매출·단가자료를 요구했고 A 씨는 어쩔 수 없이 따랐다. B사는 접착제 가격도 24% 올렸지만 A 씨는 거부할 수 없었다. 급기야 B사는 A 씨의 수요처와 직접 거래를 하기 시작했고, A 씨에게는 접착제 공급을 끊어버렸다.

참다못한 A 씨는 지난해 말 공정거래조정원에 조정을 신청했다. 조정원은 양사 대표를 불러 거래 자료를 요구했지만 조정에는 미온적이었다. 조정원은 A 씨에게 “차라리 공정거래위원회의 본조사를 받으라”고 말한 뒤 ‘조정안 미제시’로 사건을 공정위에 보냈다. 이후엔 변변한 전화 조사 한 번 없이 ‘혐의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했다. 본조사에 대비해 자료를 준비 하던 A 씨는 “이럴 거면 조정원이 왜 있는 것이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취임한 뒤 약자 보호가 공정위의 정책 기조가 되고 있다지만 정작 현장에서 약자와 밀접한 유관기관인 공정거래조정원이 일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정거래조정원은 2007년 사적분쟁 성격이 강한 불공정거래 행위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구제하기 위해 설립됐다. 비용과 시간이 드는 민사소송이나 공정위 조사까지 가지 않고 보다 신속하고 간편하게 구제를 받게 하자는 취지였다. 이 때문에 을의 마지막 호소기관으로 불린다.

하지만 최근 들어 조정원이 조정안을 제시하지 않은 채 조정 신청인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조정원이 조정안을 내면 신청인과 피신청인이 여기에 응할지 말지 스스로 결정하는데, 신청인과 피신청인이 조정안 자체를 거부하면 조정원으로서는 ‘조정성립률’이 낮아져 성과가 준다. 또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에 조정안을 내놓으면 조정실패율이 높아질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조정원이 어렵고 민감한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조정원이 조정업무 대신 판단업무에 집중한다는 지적도 있다. 조사관이 신청인을 불러 “피해 증거를 보자” “녹취록을 달라”고 하는 등 수사기관처럼 증거 수집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정원 측은 “조정안 결과는 조정협의회 차원에서 절차대로 나온다”면서 “규정에 따라 진행됐고, 부족한 면이 있다면 개선하겠다”고 말했다.

세종=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