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 걸린 ‘증세’
2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 5시간 넘게 이어진 마라톤 회의 끝에 마무리 발언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은 단호한 어조로 증세(增稅)에 대해 거론했다. 전날 회의에서 증세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던 문 대통령은 “이제 (증세 방향을) 확정해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 정부 내에서도 ‘증세론’과 ‘신중론’이 엇갈리던 가운데 문 대통령이 직접 방향타를 잡고 속전속결식 지침을 내놓은 것이다.
○ 추 대표 제안 하루 만에 호응한 문 대통령
문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대체로 어제 토론으로 (증세 방안의) 방향은 잡히지 않았나 생각한다”며 증세 추진을 기정사실화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제안한 증세 방안에 단 하루 만에 맞장구를 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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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이 증세 추진 방침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여론이 그리 부정적이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중산서민층 및 중소기업 증세는 5년 내내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대다수 국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핀셋 증세’이자 ‘조세 정의 차원’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 속도전 나선 당청, 국회 통과 관건
내년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조세 저항 가능성이 있는 증세 논의의 물꼬를 여권에서 먼저 튼 것은 사실 이례적이다.
증세 방침에 방아쇠를 당긴 추 대표의 제안은 민주당이 13일부터 이미 준비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13일은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문재인 정부의 100대 과제를 완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날이다. 이후 당청 간 치열한 논쟁을 거쳐 18일 추 대표가 당 정책위원회와 조율해 증세 범위와 방향의 얼개를 잡았다. 20일 발표된 최종 안은 청와대 측과의 조율을 통해 마련됐다. 민주당 김태년 정책위의장이 의견 조율의 키플레이어 역할을 했다. 이번 증세안 자체가 청와대와 여당의 깊은 교감으로 만들어진 사실상의 ‘합작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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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청와대와 정부가 증세를 추진하더라도 여소야대 국회라는 높은 문턱이 남아 있다. 다음 달 정부가 세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해도 실제 통과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다. 이에 청와대는 “증세는 각본이 필요 없을 정도로 오래 논의된 사안”이라고 반박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각본을 놓고 서로 교감한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증세는 1, 2년 논의된 사안이 아니며 짜맞추지 않아도 (당청이) 공동으로 인식하는 문제로 자연스럽게 이뤄진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박성진 psjin@donga.com·문병기 / 세종=최혜령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