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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가 된 신학생 “緣이란 다 그런것”

입력 | 2017-07-21 03:00:00

고양 원각사 정각 스님




17일 오후 경기 고양시 원각사에서 만난 정각 스님이 최근 출간된 도록 ‘원각사의 불교문헌’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다. 정각 스님은 “옛 문헌이나 문화 재에 대해 애정을 갖다 보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긍심도 자연스레 따라온다”고 말했다. 고양=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삶은 늘 예상한 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17일 오후 경기 고양시 원각사 앞에서 올려다본 하늘도 그랬다. 좀 전까지도 구름 가득 찌푸려 우산을 챙겼다. 근데 막상 당도하니 쨍쨍한 햇볕에 셔츠 깃마저 거치적거린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치려니, 푸른 잔디 곁에 정각 스님(59)이 진작부터 마중을 나와 섰다.

사실 스님만큼 인생의 변환이 극적인 이도 드물다.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영세까지 받은 그는 누구나 신부가 될 줄 알았다. 허나 군 제대 뒤 철학에 심취하다 불교에 귀의해 1987년 사미계를 받았다. 그리고 불교문헌을 비롯해 고문헌을 수집 보존하는 ‘문화재 지킴이’로 20여 년. 최근 그간의 노고를 집대성한 원각사 소장 고문헌 612점이 담긴 도록 ‘원각사의 불교문헌’(동국대 불교학술원)도 출간됐다.


“다 연(緣)이 그렇게 닿았을 따름이지요. 띄엄띄엄 ‘팩트’만 놓고 보면 왜 신부의 길을 걷다 승려가 됐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실은 순리 따라 간 겁니다. 그걸 억지로 비틀면 그게 더 ‘사달’이 나는 거예요. 물론 신학교 다닐 때야 짐작조차 못했죠.”

실제 스님은 가톨릭 신앙생활에 오롯이 청춘을 바쳤다. 소신학교를 거쳐 가톨릭대 신학과에서 착실하게 교육을 받았다. 그것도 매주 고해성사할 거리가 없을 정도로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갈수록 마음속 의문이 커졌다. 당시 담임신부였던 최창무 대주교에게 상담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길은 우연히 택시를 타고 “아무 가까운 절이나 가 달라”고 청해 도착했던 서울 성북구 개운사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문선규 전 전남대 교수)는 제가 미학 공부를 하겠다고 할 때부터 반대가 심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집안사람 모두 제가 신부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거든요. 고형곤 박사(전 전북대 총장)가 당숙인데 아버지가 여러 차례 고민을 털어놓으셨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깊은 숲속도 길은 어디론가 나 있는 법이죠. 길은 가본 사람들만 그게 길인 줄 압니다.”

원각사가 소장한 고문헌 중 하나인 보물 1010-2호 ‘묘법연화경언해’. 1463년 세조가 직접 경문에 구결을 달고 간경도감에서 번역해 목판으로 간행한 불경이다. 정각 스님 제공

고문헌을 비롯한 문화재에 열정을 쏟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억지로 이어붙인 게 없다. 막연히 어린 시절 고고학자를 동경했던 스님은 출가 뒤 동국대 불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계속 공부하고 답을 찾는 건 스님에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거창하게 문화재 분야에서 무슨 족적을 남길 뜻은 지금도 없습니다. 그저 배우다 보니 소중한 게 눈에 들어왔고, 소중한 것이니 지켰을 뿐입니다. 불교문헌만 고집하지도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 태극기라든가 독도 지도, 심지어 가톨릭 자료도 허술히 여긴 적이 없습니다. 다 우리 땅, 우리 세월이 깃든 역사니까요.”

그런 스님도 요즘 가슴에 소망을 하나 품고 있다. 그간 모은 보물들을 도록으로 만들었으니, 이제 사찰 옆에 작게라도 박물관 하나를 세우고 싶다. 일신을 위해 모은 돈이 없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 또한 흐르는 대로 내버려둘 요량이다.

“생각해 보면 출가 전 절에 가본 거라곤 딱 2번입니다. 중고교 수학여행 때뿐이죠. 그런데도 지금은 소박하나마 버젓이 한 사찰의 주지가 되지 않았습니까. 현재 가진 건 중요치 않습니다. 마음에 무엇을 지녔는가를 봐야죠. 요즘 속인들도 삶의 방향에 대한 고민이 많더군요. 근데, 지금 설령 잘못 가더라도 너무 근심에 휩싸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방향만 굳건하면 언젠가 길은 나타나거든요.”
 
고양=정양환 기자 ray@donga.com